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조선시대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왕실 세자 책봉 문제로 남인인 장희빈 세력에 밀려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중에 풍랑을 만나
완도에 상륙 후 해남 보길도 백도리에 머무르게 된다.
북벌의 아쉬움과 임금에 대한 서운함을 마음에 담아
백도리 해변 바위에 새겨 놓았는데 그게 오늘날의 글씐 바위이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고...
때는 조선 숙종15년 (1689년) 2월의 추운 겨울이였다!
우암 송시열의 글씐 바위
글씐 바위란 글을 쓴 바위가 아니라
글쓰임을 당한 바위란 뜻의 이름이라 한다.
몰지각한 사람들의 빈번한 탁본행위로 인해 안타깝게도
원문 글씨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嘆詩(탄시) / 尤庵(우암) 宋詩烈(송시열)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83세 늙은 이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一言胡大罪(일어호대죄)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녁하늘 해를 바라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貂襄舊萬恩在(초구만은재)
초구(임금이 하산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感激泣弧(감격읍호 )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