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순교자
Victor Jara
"내게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을
아주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는 출신 배경이 있습니다. …
나는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은 세상을
보게 해줘야 한다는 게 나의 희망입니다."
-빅토르 하라 ( Victor Jara, 1935-1973, 칠레 )-
Victor Jara - Manifesto(선언)
1935년 9월 28일 산티아고의 변두리 빈민지구에서 태어나,
1973년 9월 14일 쿠데타군에 무참히 살해당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솔직히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들은 것은 2001년초의 일이었다. 그의 음반이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의 노래를 듣기 전부터 그를 좋아했다.
가수를 좋아한다는 것은 영화배우나 탈렌트를 좋아하는 일과는 틀린 일이다. 영화배
우나 탈렌트에 대해서는 그들의 연기보다는 그가 풍기는 이미지나 외모를 좋아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가 연기한 작품을 하나도 보지 못하더라도 좋아할 수 있지만 가수는 그
의 노래를 들어보기 전에 어떤 근거로 좋아할 수 있게 될까?
그러고 보니 우연한 기회에 우리들은 그의 노래를 들어보았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 아
직 우리나라에서 최루탄 가스 냄새가 가시기 전에 TV에서 영화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혹자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고 합니다만 어쨌든)를 통해서 짧지만 빅토르
하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실제로 그가 주인공은 아니고 배우가 대신한) 어떻게 그
때 우리나라에서 그런 영화를 TV에서 해주었는지 모르겠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가 가장 존경한 이가 우리나라의 박정희였고, 그가 죽었을 때 조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는 이야기가 있고 보면 한국과 칠레 사이의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그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칠레의 선거 혁명으로 이룩한 짧았던 칠레의 봄은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의해
못다핀 꽃 한 송이가 되고 말았다.이 영화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는 쿠데타군의 병사
들이 아옌데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끌고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병사들의 총구가 삼엄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체육관.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아무 말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있다. 그곳에서 머리가 덥수룩한 젊은이 하나가 조용히 노래 를 부른다 “벤세레모스, 벤세레모스(단결하라! 단결하라!)”
점점 그의 노래 소리는 커가고, 체육관의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부르자 군인들
은 그 젊은이를 끌고 나간다. 그가 바로 칠레의 전설적인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였다.
그는 영화처럼 실제로 총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댓
가는 양 손목이 부러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 조안 하라에게 돌아오는 것
이었다. 칠레의 어떤 가수. 빅토르 하라는 그렇게 아옌데 정부와 운명을 함께 했다.
소위 '제3세계(이제는 무너져버린 용어이지만)'의 음악이 음악학자에게 관심의 대상
이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아들러(Guido Adler), 크리잔더(Karl F. Chrys
ander), 리만(Hugo Riemann)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음악학 전통은 주로 음악이론,
서양음악사, 음악미학으로 대표되는 예술음악, 혹은 악보로 전해지는 음악들에 대해
서만 관심을 보여왔고, 그 악곡의 형식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 정작 그 음악을 만들
고 향유해왔던 인간에 대한 무관심해왔다. 그후 이에 대한 반성으로 "음악이란 인간
에 의해 만들어지고 향유된다"는 극히 자명한 명제에 대해 음악학자들이 새삼 눈길을
돌리며 제3세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음악이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누에바 깐시온)'은 "월드 뮤직"이라는 새로
운 장르를 형성하는 주축으로 성장하고 있다.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이라는
말은 1969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누
에바 깐시온이라는 행사의 이름으로 붙여졌던 것이 그 범위가 점점 더 넓어져 1970년
대의 민족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칠레에서의 노래운동은 1960면대 초반 민속에
대한 연구와 보급이 주요활동이었다.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 로욜라(Margot L
oyola), 피사로, 파바스 등은 칠레의 변방과 인디오 거주지에서 상당한 양의 노래와 시,
전설, 춤을 채집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단순히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이식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디오들의 문화와도 그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고 인식하였고, 자신들의
뿌리로서 그 문화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런 의식을 대중에게도 널리 전파
하였다. 이중에서도 빅토르 하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비올레타 파라였다. 파
라는 칠레의 평원과 산악지역을 횡단하면서 거기서 흡수한 지식과 대중예술을 바탕으
로 자신의 노래를 만들어 남미 전역에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빅토르 하라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인근의 변두리 로껜(Loquen)이란 시골에서 태어
났다. 그의 아버지 마누엘(Manuel)은 소작농이었고, 술주정뱅이였다. 하라의 어머니
아만다(Amanda)는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해야만했다. 그러나 아버지 마누엘은 술
만 마시면 어머니를 구타하곤 했다. 아버지는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다른 지방으로 떠
나 버렸고, 하라의 어머니는 홀로 남아 자식들을 키웠다. 그의 어머니는 고된 노동 뒤에
도 어린 빅토르에게 기타와 칠레 민요를 들려주었다. 하라는 어머니에게 기타와 칠레
민요를 배웠다. 1950년 3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하라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
식을 듣는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에게 던져준 상심은 큰 것이었다. 그는 다니던 상업학
교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신앙에 대한 회의로 퇴학당하고 군에 입대한다.
제대한 뒤 다시 로껜으로 돌아온 빅토르 하라는 포크 음악과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
다. 이 무렵 칠레의 전통음악에 대해 공부하던 빅토르 하라는 어느날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게 된다. 빅토르 하라는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일을 하며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 그의 데뷔 첫 앨범을 내었고, 곧 칠레 전역의 들끓
는 정치적 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노래 운동의 상징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운동을 벌여 나가고, 그 와중에서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가들
과 군부에 대항하는 사회당과 아옌데의 대통령 선거를 위해 유세에 참여한다. 결국 칠
레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살바도르 아옌데는 칠레에서 민주적 선거에 의해 당
선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미국과 군부에 의해
피노체트 군사 구데타가 발생한다.
비올레타 파라를 만나기 전, 이미 어머니로부터 칠레 민속 음악의 세례를 받고 그
자신이 일찍이 시화 노래와 연극을 사랑한 청년이었던 빅토르 하라는 스무살이 되
던 해에는 사라져가는 칠레의 전통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는 등의 자각을 보였다.
그런 그에게 민요운동의 선구자 비올레타 파라와의 만남은 열정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그는 '쿤쿠멘'이라는 보컬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쿤쿠멘은 전통 민요
와 민속춤을 채집하여 그것을 연구, 연주하는 데 주력하는 그룹이었다.
빅토르 하라는 쿤쿠멘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음반을 취입하고, 대규모 군중집회에
서 연주했다. 하라가 칠레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또한 연극 연출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그가 처음 연출한「행복 비슷한
그 무엇」이라는 작품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빅토르 하라가 조안 터
너를 만난 것은 칠레 대학 연극학과의 연기 동작 강의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만
남이었다. 영국출신의 무용가 조안 터너는 전남편인 안무가 파트리시오하와 이혼
하고 첫 딸을 낳은 후 매우 상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조안은 빅토르 하라와의 사랑
을 통해 결혼에 실패한 상처를 치유받고 칠레와 민중의 상황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들의 결합으로 칠레 대학에는 새로운 형태의 무용극과 연극, 음악 공연과 노래공
연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빅토르 하라의 연극연출가로서의 특출한 재능과 열정은 제
도권에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 연극연구소의 상임
연출가 자리를 얻게 되었고, 1965년에는 가장 훌륭한 연출가들에게 주는 권위있는
상들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극 연출 분야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
에 있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없었다.
그는 제한된 장소에서의 공연이라는 연극의 한계를 극복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원했다.
1960년대 중반 칠레는 정치적 혼미를 거듭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의 지배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악착같았던 부르주아 계급이 각성하고 있는 민중을 억압하
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라의 음악도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삶의 뿌리가 뽑힌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담은 사회적 노래로 변모해갔다. 그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바치는 노래 <유령>을 비롯해서 앞으로 닥쳐올 피노체트
의 쿠데타를 예언한 듯한 노래 <군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빅토르 하라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승리를 위해 신변의 위협을 느
끼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아옌데 정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는 민중벽화운
동, 민중발레단, 노래운동 등 다양한 방면의 민중문화 운동 세력을 결집시켰다. <벤세
레모스>는 하라가 쓴 시를 첫 번째 선거운동극이었다.
아옌데가 승리하고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합법적 사회주의 정부가 출현했
다. 학생들은 문맹퇴치를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을 교육했고, 예술가들도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문화 예술 창조 욕구와 잠재력을 자극할 수 있는여러 활
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사회주의 정부를 시기한 기득권 세력은 그들에 의해 장악
된 언론을 이용해 악의에 찬 여론 조작을 해나갔다. 하라는 1971년말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순회하며 칠레 민중들의 삶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를 노래했다. 점증해가는군
부의 쿠데타 음모를 경고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전국적인 캠페인을 열었다.
아옌데 정부 역시 미국의 시장 교란과 위협을 극복하며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고,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
었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은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었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기 전에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다. 바로
그 투표를 하려고 했던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빅토르 하라는 미국과 헨리 키신저(노벨평화상을 받은
바로 그 사람), CIA 그리고 피노체트가 장악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아옌데가 칠레
의 모데나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던 바로 그 때 살해당했다.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벌어진 일주일 동안 3만여 명의 칠레 시민이 학살당했다. 그후 피노체트
집권 기간동안 사망자 3천여 명, 실종 1천여 명,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추방 100
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최고의 경찰국가답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
았으며 미국 CIA는 칠레 비밀경찰과 손잡고 양심적 지식인들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빅토르 하라는 고통받는 칠레 민중을 위해 노래불렀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칠레 군부는 그를 때리고,
고문한 뒤 양 손목을 부러뜨리고 죽였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곳
어디에선가는 끊임없이 그의 노래가 불려졌고, 그는 시와 음악이 사람들을 양심에
따라 행동하도록 일깨우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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