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여름날의 꿈
< 지리 천왕봉과 일출기운 >
세석에 익어가는 여름풍경이 그리워
휘영청 보름달 비친 고원의 밤이 보고파 길을 나섰다
혹시나 얼어 죽지는 않을까..
행여 굶어 죽는건 아닌지..
바리바리 싸들고 세석으로 향하는길
영신봉 올라 반야에 지는 석양 바라보며 마음씻고
너른고원 한켠에 앉아 별바라기 하면서 시름달래고
촛대봉 일출보며 붉게익는 천왕에 가슴 지져보고
천상화원 세석에서 꽃향기에 취해 볼려고
혼자만의 바램과 욕심을 품고 올랐던 산행길
땡볕 퍼붓는 거림을 출발 세석까지
흘린 땀방울이 등로를 적시고 흐느적대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위태로웠다
내 삶에 씌워진 멍에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중력이
견딜수 없을 만큼 날 괴롭혔다
< 삼신봉 능선 일출능선 그리고 천왕 >
< 삼신봉, 연화봉, 제석봉, 상봉, 중봉 그리메 >
그렇게 겨우오른 세석하늘은 운무로 가득찼고
산장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는
잠시나마 피안을 꿈꿨던 나의 욕심을
산산히 조각내 버렸다
죽을힘 다해 짊어져 온 배낭만큼이나
무거운 욕심을 안고온 나에게
지리는 문을 닫았고 난 길바닥에 자리를 편채
밤새도록 포효하는 바람소리만을 들어야 했다
운무에 감춰진 보름달은 바람이 잠시 시든 새벽녘이 되어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고
초롱한 별빛도 그제서야 세석의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드디어 굳게 닫힌 지리의 문이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며 되뇌이던 바램을
가엾이 여긴걸까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달빛에 희뿌연 세석고원을 굽어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꺽여진 희망을 되살렸다
< 해오름 >
밤새 침전된 어둠이 이슬에 절여 질척거리고
무겁게 내려앉는 고요가 굳어져
미동의 그림자 마저 사라져 버린 적막강산
단단히 고착된 침묵의 시공이
영원할 것 같아 암담한 세석의 새벽은
동녁하늘 멀리
미명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천왕일출을 보려고 서둘러 떠나는 산객들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커피 한잔을 끊이고 찌푸등한 몸둥일 요리조리 비틀어 몸을 푼뒤
알싸한 새벽아침 신선한 지리향내를 흠뻑 가슴에 넣었다
폐부 깊숙히 스며든 공기가 몸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지
오른쪽 가슴이 아려왔다
주능선은 부산하게 움직이는
도깨비 불빛들이 줄을 이어 천왕으로 향했다
남부능선에 걸려있던 보름달이
뉘엇뉘엇 마루금 뒤로 떨어지자
세석하늘엔 다시금 검은 장막이 드리워 어두워졌지만
이내 촛대봉 위로 시퍼런 여명이 번지며 어둠을 몰아냈다
아직 걷히지 않은 어스름한 계단길을
무덤덤히 올라 촛대봉 암봉에 서니
강풍이 몸을 날릴듯 세차게 불어 제쳤다
검은 베일을 뒤집어 쓴 상봉 뒤로
대지와 수평을 이룬 띠구름이
동녘 하늘을 덮어 일출을 놓치지 않나 애를 태웠으나
서서히 여명을 물들이던 일출기운이
구름을 사르고
마침내 벌건 불덩이를 토해냈다
누군가 촛대봉 암봉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노래는 지칠줄 모른채 계속 되었고
거북이 등짝처럼 딱딱해진 나의 가슴과
지리에 심취해 노래를 부르던 그의 가슴도
눈부시게 찬란한 일출앞에 촛농처럼 맥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십여명의 산객들이 뱉어낸 신음소리가 산정에 메아리쳤다
일출과 함께 한신지계곡을 타고 몰려든 운무가 상봉을 휘감으며 춤을 추웠다
운무에 산란된 빛이 시시각각 영롱한 색감을 발산하고
그것은 색정에 눈먼 여인의 추파처럼 강렬하게
굶주린 야수의 눈빛처럼 날카롭게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 촛대봉 암괴 >
< 세석고원의 아침뒤로 영신봉과 멀리 명선봉, 반야봉이 보인다 >
< 한신지곡에서 솟아오른 운무 >
< 세석고원의 아침 >
< 영신봉 >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운무의 볼모가 된 상봉을 뒤로한채 세석 꽃밭길을 걸었다
밤새 이슬 머금은 야생화 화원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구상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아진 꽃송이들
빨강 동자꽃, 연보라 비비추, 주황색 나리꽃, 보랏빛 도라지모싯대,
노란 기린초, 솜사탕 터리풀, 하얀색 당귀..
저마다 고운색깔로 천상화원 세석고원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 천상화원 세석꽃밭 >
< 동자꽃 >
< 도라지모싯대 >
< 일월비비추 >
< 고요한 아침의 정원 세석산장 >
< 나리꽃 >
찬밥에 국물말아 아침을 떼우고 한잔의 커피를 더 마신후
당초 계획된 코스를 미련없이 떨치고 온길을 되돌려 하산을 했다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욕심을 버렸다
거림까지 걷는동안 쉬 끝을 보여주지 않는 길을 원망하면서도
하얀밤속에서 천번도 넘게 쌓았던 모래성을 부수며 꾼 지리의 꿈과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촛대봉 일출이 날 미소짖게 하였다
난 매번 지리에 들때면 걱정과 설렘이 교차한다
갈수록 약해지는 체력이 자꾸만 커져가는 욕심을 따르지 못해서이다
그래도 아직은 지리에 갈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남은 힘이 언제 소진될지..
산에 갈 수 있을때 가라고 한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날이 오기때문에..
지리에 들 수 있는 지금이 내 인생의 꿈날이요 봄날이 아닐까 싶다
< 원추리 >
내가 해석하고 내가 그린 나의 산으로서 난 지리를 본다
갈 수 있는 그날까지 나만의 지리는 나를 통해 존재하고
그 시각으로 지리를 담아 내 영혼을 살찌우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