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騨の月-原田悠里 作詞 つじ伸一 作曲 岸本健介 編曲 前田俊明
一 そっと襟あし 撫でてゆく 風はあなたの 吐息でしょうか 中橋を渡れば 三之町 訪ね来ました 逢いたくて すっとわたしは 独りでいたと とうか伝えて・・・ 飛騨の月
二 宵の祭りに ふたりして 堅く結んだ 心と心 きっと解けて いないこと 今でも信じて いる私 江名子川に浮かんで ふるえて揺れて 泣いてくれてる・・・ 飛騨の月
三 両掌合わせる 白川郷の 茅葺(やね)は私の 祈りの姿 あなた以外に 希みなど 本当は何にも ありません 夢を抱きしめ 持ってることを とうか伝えて・・・ 飛騨の月
関ヶ原ウォーランド 大垣駅(岐阜県大垣市)에서 東海道本線을 타고 조금 지나면 兩쪽으로 멀리 보였던 山들이 갑자기 가까워지면서 드넓은 平野가마치 거짓말처럼 좁은 溪谷 같은 地形으로 變합니다. 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언덕 중턱에 ‘関ヶ原古戦場’이라는 看板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約 400年 前인 慶長(けいちょう) 5年 9月 15日(西紀 1600年 10月 21日) 日本 歷史上 最大의 戰鬪인‘関ヶ原合戰’이 벌어진 곳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곳에 訪問했지만 몇 번을 오더라도 이 近處를 通過할 무렵이 되면 車窓 밖을 左右로 唯心히 살펴 봅니다. 東軍,西軍 合쳐 16万 名이 넘는 武士들이 激突해 總 8,000-數万 名의 死亡者가 나왔다는 点을 생각하면 單純히‘병사들도 단지 꿈의 흔적인가(つわものどもが夢の跡-松尾芭蕉가 지은 하이쿠의 일부)’ 라는 浪漫을 넘어 몸을 緊張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生きている博物館, 関ヶ原町 不破の関町(岐阜県不破郡(ふわぐん) 関ヶ原町(せきがはらちょう))은 苦待부터 交通의 要衝地 役割을 했으며 지금도 名古屋를 中心으로 한 中京圏과 大坂를 中心으로 한 関西圏의 接點으로 日本의 東西를 잇는 東海道新幹線,JR 東海道本線,名神(めいしん) 高速道路 登이 마을의 中心을 지나고 있습니다.
奈良時代(710-784年) 以前부터 大和(現在의 奈良県)에 있던 首都를 東쪽 地方(東国)으로부터 지키기 爲해 不破の関(ふわのせき=徵稅와 檢問을 담당하던 官廳)를 두었으며 古代 最高의 王位 繼承 戰爭이었던 壬申の乱(しんんのらん.672 年)에서는 이긴 쪽의 戰略的 據點이었습니다. 大戰鬪가 일어나더라도 異常하지 않을 만한 地域입니다.
不破の関는 海拔 1.377m의 伊吹山(いぶきやま)를 비롯해 300~400m 前後의 山들로 둘러싸인 東西 約 4km,南北 約 2km의 盆地 입니다. 東軍의 總 司令官인 德川家康가 3万 名의 兵士를 이끌고 처음으로 陣地를 構築한 곳에서 西軍의 中心이었던 石田三成(いしだみつなり)의 陣地까지는 約 l.5km. 이런 좁은 場所에서 兩쪽 合해 約 16万의 軍士들이 戰鬪를 벌였기 때문에 지금도 各軍의 陣地와 主要 戰鬪 場所는 大部分 明確히 밝혀져 있습니다.
関ヶ原戦闘 慶長 3年(1598年) 日本을 統一한 豊臣秀吉(1536~1598年)는 죽기 前에 아들 인 豊臣秀賴를 後繼者로 定하고 德川家康(1542~1616년)와 石田三成(1560~1600年) 等 10名의 有力한 大名 武将들을 補佐官 兼 後見人으로 삼아 아들을 付託했습니다.그러나 秀吉가 死亡한지 얼마 안돼 豊臣 政權에서는 家康를 中心으로 한 勢力과 그에 對抗하는 勢力 사이의 主導權 爭奪이 심해 졌습니다 江戶.(지금의 東京)를 本據地로 東쪽에서 進軍해 온 家康의 東軍과 大阪城을 據点으로 西쪽에서 進軍한 三成의 西軍은 慶長 5年 9月 15日에関ヶ原에서 戦闘를 開始하게 됩니다.
午前 8時 무렵에 始作된 戰鬪는 거의 호각을 다투며 展開되었지만 西軍의 有力한 大名인 小早川秀秋(こばやかわひであき)의 万 五千 大軍이 갑자기 我軍을 攻擊하기 始作하면서 西軍은 瞬息間에 무너 지고 맙니다. 戰鬪는 午後 4時 무렵에 東軍의 大勝으로 끝을 맺습니다.
戰爭에서 진 石田三成는 다음 날 사로 잡혀 處刑을 當합니다. 그 結果 德川의 覇權이 確立됐으며 関ヶ原戦闘는‘天下를 가르는 戰鬪 (天下分け目の戦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 지금도 重要한 勝敗를 決定짓는 勝負를 ‘天下分け目の戦い’라고도 합니다. 戰鬪가 있은 지 3年 뒤인 1603年,德川家康는 武家의 最高 權威인 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으로 就任한 뒤 江戸에 幕府를 세우게 되며, 以後 1867年 幕府 時代가 막을 내릴 때까지 長期 政權을 維持합니다.
関ヶ原ウォーランド 関ヶ原ウォーランド는 東西 兩軍이 激烈한 戰鬪를 펼친 數十 곳의 戰爭터를 비롯해 特히 石田三成를 비롯한 西軍 名將들의 陣地와 戰鬪에서 이긴 東軍이 敵軍의 머리를 確因하던 實驗場(首実驗場) 等 가장 主要한 章疏 열 곳을 選定해 當時 모습 그대로 再現한 博物館입니다. 史実과 時代的 證據는 모두 歷史 專門家의 指導와 監督 下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敷地 總 面積은 約 30,000㎡. 열 곳의 戰爭터에는 콘크리트에 鮮明하게 色을 칠한 實物 크기의 武將과 兵士 模型이 約 200個 以上 配置되어 있습니다. 모두 實際 戰爭에 臨하고 있는 表情이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어딘지 재미있습니다. 敷地 內에는 関ヶ原戦闘 資料館과 갑옷과 鬪具 資料館도 있어 関ヶ原戦闘를 더욱 잘 理解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