涙化粧-真木由布子 作詞 石本美由起 作曲 市川昭介
一 手紙に涙隠して 夜の化粧の口紅をさす 口紅をさす 信じても逢う瀬短い いで湯妻 この髪この指 この爪までも みんな愛して 欲しいのよ
二 綺麗だと言葉やさしく 着物姿を 褒められたいの 褒められたいの 盃に思い 溢れる こころ酒 その顔その声 その手の癖を 忘れたくない 私です
三 弱虫の涙ぼくらが みんな知ってる 私の運命 私の運命 命なら迷うことなく あずけます この頬この肌 このほくろまで 好きな あなたの ものですよ
日本文化の始め平安時代 平安時代는 8世紀 後半부터 12世紀 後半까지 약 400年間을 가리키는 말로 日本 歷史의 時代區分 中 가장 긴 時代입니다 400年의 歷史를 크게 나누면 前半은 有力한 貴族인 藤原 家門이 政治를 主導하고 中國의 影響을 벗어나 日本의 獨自的인 文化가 나타나기 始作한 始期이고 後半은 貴族 政治가 무너지면서 武土라는 새로운 勢力이 登場한 時期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平安時代의 前半에 있었던 国風文化에 대해 紹介하려 합니다.
千年首都,平城京
奈良時代의 首都 平城京(へいじょうきょう)를 뒤로하고 平安京(へいあんきょう)를 建設한 것은 第50代 桓武天皇(かんむてんのう)입니다 지나치게 커진 佛敎勢力에서 벗어나기 爲해 784年,首都를 現在의 京都府 南西쪽의 長岡京(ながおかきょう)로 옮겼으나 고작 10年 만에 다시 現在의 京都市로 遷都하게 됩니다. 바로 平安京입니다 794年부터 武士政權인 鎌倉幕府(かまくらばくふ)가 세워지기 까지를 平安時代라고 합니다. 以後 時代에 따라 政治의 中心地는 다른 곳으로 바뀌었지만 平安京는 1869年에 首都가 東京으로 옮겨질 때까지 天皇이 사는 日本의 中心地였습니다. 京都기‘千年의 首都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日本最高の文學作品 源氏物語 国風文化 中에서도 日本 最高의 文學作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源氏物語り(げんじものがたり)』입니다 紫式部(むらさきしきぶ)라는 女流作家가 主人公 光源氏(ひかるげんじ)의 사랑 이야기를 中心으로 當時의 宮中生活을 그린 長篇小說입니다. 今年이 『紫式部』의 千年紀(せんねんき) 卽,執筆 된지 千年이 된 해라고 합니다.
『源氏物語』는 지금도 文學,演劇,映畵 오페라 音樂 漫畵 等 多樣한 分野에 影響을 미치며 幅넓은 人氣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古典文學인 만큼 原文을 읽는 것은 무척 어렵지만 요즘에는 몇몇 有名한 作家,文學者들이 現代語로 出刊하여 쉽게 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最近에 出版된 女流作家 瀬戸内寂聴(せとうちじゃくちょう)의 現代語 譯은 200万 部가 넘게 販賣되며‘源氏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한,1920年代 後半에는 英國인 아더 웨일리(Arthur Waley)가 英語로 飜譯하여 世界 最高의 文學 作品 中 하나로 評價되기도 했으며 最近에는 中國과 韓國에도 飜譯되는 等 世界 各國에서 飜譯本이 出版되고 있습니다.
千年紀인 올해는 京都를 中心으로 兵庫県 滋賀県 宮城県 等 『源氏物語』와 關聯된 県 에서 여러 가지 事業이나 이벤트가 開催된다고 합니다.
滋賀県의 県庁 所在地 大津市(おおつし)에 있는 石山寺(いしやまてら)는 紫式部가 『源氏物語』를 構想했다고 傳해지는 寺刹입니다.
平安時代에는 女性들이 절에서 讀經을 하면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流行했는데,石山寺에도 그러 한 女性들이 모여들어,많은 女流文學 作品의 舞臺가 된 곳이랍니다 .747年에 建立된 이 寺刹은 日本 最大의 湖水인 琵琶湖(びわこ) 바로 옆에 있습니다. 奈良의 훌륭한 東大門(とうだいもん)을 지나 가파른 階段을 올라가면 巨大한 岩盤 위에 세워진 本堂이 나타납니다. 普通 寺刹에서는 本尊佛을 비롯한 數많은 佛像이 參拜者를 맞아주지만 石山寺의 雰圍氣는 조금 다르답니다.
本堂 正面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源氏の間(げんじのま)’라는 房에 紫式部가 앉아 있습니다. 當時 貴族 女性들의 옷을 입고 冊床을 向해 앉아 執筆을 하고 있는 人形이지요. 紫式部는『源氏物語』를 構想하면서 좀처럼 좋은 이야기가 떠 오르지 않아 7日間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女의 뒤에는 下女 인 듯한 少女 가 앉아 있는데 이 두 人形에서 千年 前의 모습인 紫式部의『源氏物語』를 떠오르게 합니다.
貴族政治の全盛期,平安時代
京都의 象徵 東寺
京都에 가면 JR 京都 駅 近處에 있는 높은 塔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55 m, 現存하는 日本의 寺塔가운데 가장 높은 東寺(とうじ)의 五層塔입니다. 794年 平城京에서 平安京으로 遷都할 때 나라의 平和를 지키기 爲해 首都의 正門인 羅城門(らじょうもん)의 東쪽과 西쪽에 東寺와 西寺(さいじ)라는 巨大한 寺刹이 建立되었습니다. 東寺는 그 場所에 남아 있지만,西寺는 燒失되어 지금은 그 터에 어린이公園이 들어서 있습니다.
東寺는 平安時代 初期인 823年 中國에서 佛敎의 一種인 真言密教(しんごんみっきょう)를 들여온 僧侶 空海(くうかい)에게 下賜되어 그 以後 真言密教의 中心地가 된 곳입니다. 넓은 敷地 안에 서 있는 五層塔을 비롯해 國寶級 建物이나 佛像은 볼만한 價値가 있습니다. 매달 21日에는 空海의 忌日에서 由來된 供養 行事가 열리는데 1000個가 넘는 露店이 들어서고 20万 名 以上의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藤原家門の摂関政治(せっかんせいじ)
平安時代 後半인 400年 中,藤原氏를 中心으로 한 貴族政治(きぞくせいじ),다음으로 그것에 對抗하는 皇室政治,武士 階級의 勢力이 커져 日本 歷史上 첫 武士政權이 登場한 始期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러한 變化의 主要 舞臺가 된 곳이 天皇의 住居地이자 政治가 이루어졌던 御所(ごしょ)입니다. 現在 京都御所(きょうとごしょ)는 794年에 처음 만들어진 곳에서 꽤 西쪽으로 옮겨졌지만 明治維新으로 皇居가 東京으로 옮겨질 때까지 約 540年間 天皇이 살았던 곳입니다.
御所의 크기는 東西 約700m,南北 約 1,300m의 廣大한 公園인 御苑(ぎょえん)에. 皇族과 貴族의 邸宅이 200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藤原氏는“大化の改新”에 貢獻한 藤原鎌足(ふじわらのかまたり)가 繁榮의 기틀을 닦고 奈良時代 初期부터 딸들을 天皇의 皇后나 後宮으로 들여보내면서 政治를 움직이는 巨大한 勢力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平安時代에 들어서서 9世紀 中半 頃에 政治의 實權을 쥔 藤原義房(ふじわらよしふさ)가 皇族 外에는 처음으로 摂政(せっしょう)의 地位에 오르고 이어서 그의 養子인 藤原基経(ふじわらのもとつね)가 関白가(かんぱく)에 就任하면서 藤原氏에 依한 摂関政治(せっかんせいじ)가 始作되었습니다.
天皇 家와의 婚姻關係를 바탕으로 絶對的인 權力을 손에 넣은 藤原氏는 1世紀 初 半, 藤原道長(ふじわらのみちなが)와 그의 아들인 頼道(よりみち) 時代에 ‘摂関政治’의 全盛期를 맞이했습니다. 藤原氏의 黃金期를 端的으로 보여주는 短歌(たんか)를 하나 紹介할까 합니다.
道長가 지은 ‘この世をば 我が世と 我が世とぞ思う 望月の 欠けたることも なしと思えば’ 라는 詩입니다. 現代文으로 고치면 ‘世界は私のものだ。満月のように欠けたところなど何もなく満ち足り気分だ (世上은 나의 것이다. 보름달처럼 모자람 없는 充滿한 氣分이다)’라고 解釋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自信滿滿 態度 이런 詩는 最高의 權力者 밖에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藤原氏의 全盛期 때 지어진 建物 中에 京都市의 南西쪽 宇治(うじ)에 있는 平等院(びょうどういん)은. 藤原頼道가 아버지 道長의 別莊을 寺刹로 바꾼 것입니다. 建物의 모습이 想像 속의 吉鳥인 鳳凰과 닮았다는 鳳凰堂(ほうおうどう)로 有名 한 곳입니다. 鳳凰堂의 本尊인 阿弥陀如来像(あみだにょらいぞう)는 이 時代를 代表하는 佛敎 藝術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魅了시키고 있습니다.
上皇による政治
藤原道長(ふじわらのみちなが)가 죽은 後 摂関政治(せっかんせいじ)는 漸次 衰退하여 天皇이 主導하는 政治로 바뀌게 됩니다. 1086年 白河天皇(しらかわてんのう)이 여덞살의 어린 天皇에게 讓位하고 自身은 上皇(じょうこう)이 되어 政治를 行했습니다. 院政(いんせい)이라 불리는 政治 形態의 始初입니다.
‘院(いん)’은 上皇이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天皇을 後見 하는 上皇이 政治의 實權을 쥐는 것을 ‘院政(いんせい)’이라 합니다. 上皇이 어린 天皇의 補佐役을 擔當했기 때문 과 関白의 힘은 차츰 弱化되었고 院政은 平安時代 末까지 100年間 持續되었습니다.
武士の登場
9世紀 末境부터 皇族들이 臣下의 身分이 되어 地方政府의 責任者로 赴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現地의 豪族이나 實力者와 婚姻關係를 맺으며 漸次 勢力을 넓혀갔습니다. 代表的인 것이 平氏(へいし)와 源氏(げんじ)입니다. 그들은 武士로서 上皇이 사는 宮闕을 지키는 한편 地方에서는 莊園이라는 농장을 經營하며 武力과 經濟力을 蓄積해 갔습니다. 이리하여 武士集團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平安時代 末에는 天皇과 貴族 勢力을 代身하는 權力을 손에 넣어 平氏와의 勢力다툼에서 勝利한 源氏의 源 賴朝(みなもとよりあさ)가 日本 最初의 武士 政權을 開倉하며 歷史는 鎌倉時代(かまくらじだい)로 들어서게 됩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