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 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구나
2.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 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목포 출신이었던 영화배우 지망생인 대학생 남진은
2년간 한동훈음악학원에서 가수 훈련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곡을 받아 팝 가수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데뷔초 트로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유행하면서 트로트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 작곡가 박춘석으로 부터 <가슴아프게>라는 곡을 받아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제대후 1974년, <그대여 변치마오>라는 곡이 유명세를 타면서
당시 유명한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약 60여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어 출연하였다.
1975년을 기점으로 <마음이 고와야지> ,<님과 함께>라는 곡이 빅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막강한 세력이었던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뤄 한국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가요계를 들었다 놨다하는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거듭났다.
그는 가요계에서 2인 체제를 이룩할만큼 영향력이 컸다.
그리고 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배우였다.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남진은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한동안 미국에 있다가 1983년에 귀국하여 <빈잔>이라는 곡으로 복귀하여 가수재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방송출연이 힘들어지자 귀향하여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1989년 11월, 조직폭력배로 부터 피습을 당해 한동안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몇년간 이런 생활을 해오다가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이라는 곡으로
다시 한번 가수왕의 위력을 전파시켰다.
그의 노래는 젊은 층들이 많이 불렀는데 <하숙생> 부터 시작해서
<미워도 다시한번> <님과 함께> <젊은 초원>등 그 당시 많은 청소년들에게 그의 노래들이 인기를 차지 했었다.
남진은 나훈아와는 달리 박진감 넘치고 신나게 부르는 노래가 많았다.
물론 <우수>같은 약간 가라앉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과 같은 신나는 노래가 많다.
<가슴아프게> 같은 아무리 슬픈 노래라도 그의 음성에서는 기쁘게 불렀다
2011년 <너말이야/ 잘가라 청춘아>
2010년 <사랑하며 살테요/ 너는 내 세상>
2009년 <당신이 좋아> <님오신 목포항>
2008년 <나야 나>
2005년 <저리가>
2002년 <모르리>
2000년 <둥지>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1992년 <바다>
1987년 <내가 나를>
1984년 <사나이라면>
1982년 <빈잔>
1979년 <사나이기에/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1978년 <울긴요 내가 울긴요/ 네가 설마>
1977년 <형/ 미워도 다시 한번>
1976년 <어머님/ 우수>
1975년 <임과 함께>
1974년 <마음이 고와야지>
1973년 <그대여 변치마오/ 젊은 초원>
1972년 <아랫마을 이쁜이/ 목화 아가씨>
1971년 <마음이 약해서/ 지금은 헤어져도>
1970년 <사랑하고 있어요/ 울려고 내가 왔나>
1967년 <가슴 아프게>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 연애 0번지>
영화
-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 1975년 "가수왕"
- 1974년 "애정이 꽃피는 계절" "그대여 변치마오" 외
- 1973년 "흑조" "항구의 등불" "세노야 세노야" 외
- 1972년 "친구"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외
- 1971년 "기러기 남매" "포상금" "어머님 전상서"
- 1970년 "유정무정" "시아버지"
- 1969년 "흑산도 아가씨" "항구 8번가" "푸른 사과" "청춘"
- 1967년 "울려고 내가 왔나" "그리움은 가슴마다" "가슴 아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