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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가로등 / 장덕

무정애환 2010. 12. 13. 06:51








 

 


장덕




소녀와 가로등 /진미령


소녀와 가로등 /진미령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 있었지요.  
밤 하늘 바라 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 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불은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소녀와 가로등 /진미령 



29살의 어린나이에 요절한가수 장덕을 소개합니다
7080세대는 다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최초의 여성 싱어송 라이터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장덕입니다
고등학생부터 작곡에 있어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고 결국 고등학생때
진미령에게 소녀와 가로등이란 노래를 주어 국제가요제에 입상하기까지 합니다
그이후 3년연속 입상하게 되지요..
오빠 장현씨와 같이 현이와덕이란 그룹으로도 활동했구요..
수많은 힛트곡을 동료가수들에게 선사합니다...
특히 미소를 띄우며 보낸 그사람처럼 이 대중에게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오빠의 암 판정과 여러가지 이유로 장덕은 수면제 없이 잠을 못이루게되고
1990년 어느날 29살에 나이로 장덕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가 죽기얼마전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발표하고
또 동료가수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노래를 선물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므로써
항간엔 자살이 아니냐는 설도 있습니다.. 
깜찍한외모에 시대를 앞서가는 작곡능력,당찬 무대매너등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장덕...
좋은 노래가 아주 많이 있지만 오늘은 국제가요제 첫 입상곡 소녀와 가로등을 띄웁니다
오랜만에 같이 들어보세요~^^

진미령, 원조 개그맨 전유성씨 부인으로 소개하면 될까? 어쨌든 이 노래는 70년대 말, 진미령씨가 부른 '소녀와 가로등'이다. 이 노래에는 또 다른 사연이 숨겨있다. 노래의 작사, 작곡자는 당시 중학생 장덕이었다. 장덕은 이후 자기 오빠(장현)와 혼성 Duet으로 노래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한참 나이인 20대 후반에 자살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스스로 그 흔한 가로등의 위로 마저 찾지 못한 원조 '가여린 소녀'였던 것이다. 노랫말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구절과 내용이 있다. '별 하나 없는 하늘'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꿈마저 허락하지 않는 하늘 그래서 차갑기만 한 하늘. '외로이 울고 있는 소녀' 무슨 연유에서인지 울고 있는 소녀 어둠으로 그 눈물이 가려짐도 하건만 한없는 소녀의 가여림. '창백한 가로등의 위로' 그 누구로부터의 따듯한 위로도 없이 파리하게 비추는 가로등만이 소녀를 비추고, 달랜다. 이 노래를 들을 때 마다 공장에 다니는 나이 어린 소녀가 떠오른다. 고향 집에 생활비를 그리고 집에 남겨진 남자 형제의 학비를 보내야 하기에 아무런 불평도 드러냄 없이 온종일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구로동 자취방을 찾으며 잠시 쳐다본 하늘, 별 하나 없고 그저 가로등만이 희망으로 그 좁은 골목을 비추며 소녀를 위로한다. 소녀와 가로등이란 노래로 뚜렷히 연상되는 한 장면이다. 최근 운전을 하며 다소 오래 된 가요를 듣는다. 이 노래들 중 유독 이 노래만 나오면 난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외로운 소녀의 처지에 공감하고 또 그 소녀를 위로하는 가로등이 되고자 한다. '가로등' 독일의 과학철학자 Weisaecker를 떠 올린다. 그는 학문을 가로등에 비유했다. 앎을 지향하는 학문이 마치 어두움을 밝히는 가로등과 같다는 그의 비유는 탁월했다. 한데 그는 학문과 앎에 대해 일정 비판도 가했다. 분명 가로등에 의해 환히 밝혀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학문의 순기능에 해당한다. 하지만 밝혀지는 이외의 부분은 더 어두워진다는 사실, 학문에 의해 일부를 얻음으로써 오히려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는 학문의 역설을 그는 또한 강조했던 것이다. 이어서 그는 또 다른 탁월한 비유를 한다. 한 사람이 가로등이 비춰지는 곳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다. 지나가는 이가 묻는다. '무엇을 찾고 있냐'고. 그는 답한다. '열쇠를 찾는다'고 지나가던 이가 되묻는다.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그는 답한다. '잘 모른다'고. 지나가던 이가 또 묻는다. '왜 여기서 찾느냐'고 그는 답한다. '여기가 밝기 때문에'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그 근원적 회의 없이 그저 자신이 익숙한 곳이기에 또는 밝기 때문에 찾는다는 오류, 자기 학문만을 고집하는 오류를 경계한 것이다. 구로동의 가로등은 비록 창백할지라도 슬픔에 지친 소녀를 위로했다. 한데 내 학문은, 내 앎은 과연 누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내 스스로의 학문적 아집에만 허우적거리며 허망한 공리(空理)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 하나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가로등보다 못한 내 학문의 부질없음을 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