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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부루스 / 이주일

무정애환 2011. 5. 3. 13:33

 


어릴 때 본 우체국 정장 차림의 집배원이 크리스마스 카드 한통을 전해주었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보낸 사람은 ‘이주일’ 이었다. 나는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꿈이었다. 그가 보낸 카드를 뜯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만일 그가 편지를 썼다면 지금 사는 곳이 고통도 근심도 없는 좋은 세상이라며 익살을 늘어 놓았을 지도 모른다. 


이주일은 지금 하늘에서 산다. 척박한 세상에 태어나 중년까지 죽도록 고생하며 살았었다. 뒤늦게 천부적인 희극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 시절 고단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시름을 웃음으로 달래주며 ‘코미디 황제’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부자도 되어 보고 국회의원도 해보았지만 그는 “별로 즐거운 일이 없었다.”는 말을 남기고 2002년 일산의 암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필자는 이주일이 일산의 국립 원자력병원에 입원중일 때 문병을 갔었다. 신문사에 재직할 때였지만 목적은 순수한 문병이었다. 기자시절부터 친분을 나누어 왔던 사이였다.


병실을 노크하자 간병을 하고 있던 부인 제화자씨는 환자를 위해 면회를 시킬 수 없다며 한사코 만류했다. 매우 먼 길을 마음먹고 찾아갔는데 냉큼 발걸음이 돌아서질 않았다. 한참을 문밖에서 기웃거렸다. 문이 열리면 본인 모르게 그냥 얼굴이라도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부인이 잠시 병실을 나가는 틈에 무턱대고 들어갔다. 이주일은 1인실에서 혼자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 산소 호홉기를 걸어 두고 있었지만 의식이 명료하고 시선도 평온해 보였다.

 

 

 


 “어쩐 일이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해왔다. 무표정 했지만 목소리도 보통 때와 같았다.


 “좀 어때요? 얼굴은 좋아 보이는데..”


의례적인 대답을 하고 잠시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어갔다.


 “참 김국장 어른은 돌아가셨죠? 회갑연 때 참 보기 좋았어요. 분위기도 좋았고..”


그는 필자의 어른이 고희연을 겸한 시집출판기념회 때 자신이 하객으로 참석했던 일을 화제 거리로 끄집어냈다. 회갑연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나 그 때의 일은 우리 두 사람의 인연에서 서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고 필자에게 베푼 그의 큰 배려였다. 그 무렵 이주일은 숨 돌릴 시간도 돈이 되던 때였다.


 “할 일이 많을 텐데 빨리 회복을 해야지요.”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다 잊어 버렸어요. 어려울 때는 즐거웠던 때를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뭐 그렇게 즐거웠던 때도 없었던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정신없이 살다보니 좋은 때가 언제였는지. 이것 저것 이길 저 길로 다녀 봤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고달픈 게 아닌지. 한세상 사는 게 별 것도 아닌데..”


곧 부인이 들어 왔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말릴 수 있는 분위기를 넘어 서 있었다. 한참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이어 갔으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즐거운 때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성공한 예능인으로 부와 명예를 꼭지점까지 누렸던 이주일이 남긴 말은 인간의 욕망이 결국 허망하다는 거였다.

 

 

필자는 이전까진 그의 얼굴에서 한 번도 쓸쓸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6대 독자 또는 7대 독자라고도 했던 그의 다 키운 아들이 교통사고로 떠난 곳에서도 그는 절망하는 모습을 애써 감추며 사건 정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여유가 있었다.


이주일은 많은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 그중에 가장 고귀한 것은 그의 예사롭지 않은 삶의 발자취이며 그리고 밑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대기만성의 지혜와 인내, 도전 정신이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실존 기록이다.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고 살던 어머니의 젖에는 젖이 나오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해서 태어난뒤 6.25의 지옥에서 살아 남아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세대는 저마다 어머니의 눈물을 젖대신 먹고 자란 슬픈 가족사를 잊지 못하고 산다.


이주일도 그 시절에 자랐다. 고향은 정주영 현대건설 창업주의 고향과 인접한 강원도 북단의 농촌이었다. 그는 기자들의 인터뷰 대상이 되었던 초기에 “정회장과 집안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근거 없는 추측이었고 다만 그를 좋아하는 정회장을 만나 정치적인 연을 맺어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나중에 공무원이 된뒤 굶지 않고 살기는 했지만 그의 성장기는 평탄하지 않았다.우선 어릴 때부터 장난끼가 넘쳤던 그는 학교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다. 중학시절부터 튀는 행동으로 문제 학생 취급을 받기도 했다. 별나게 주저앉은 그의 코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강릉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불량배에게 덤비다가 보트의 삿대로 얻어맞아 무너진 사연이 묻혀 있다. 함께 놀던 여자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을 죽이기 싫어 시비를 걸어 오는 아이들과 한바탕 소동을 벌이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는 일찍부터 잘 생기지 못한 얼굴에 대한 컴플랙스를 재치 있는 말솜씨와 웃기는 행위로 시선을 끄는 쪽으로 해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고생문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면서 시작된다. 대학갈 돈을 도박으로 날렸다는 그는 일정한 직업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군예대를 지망하면서 쇼인생의 길을 본격적으로 노크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특별히 못생긴 얼굴로 인한 수모와 모멸감은 저만치 중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출세 길을 막아섰고 끊임없이 괴롭혔다.


“야 임마 정신차려. 너같은 놈이 올 곳이 아니야. 논산으로 가.”


예능에 끼가 있는 지망자들이 몰리는 군예대의 입구에서부터 면접관은 기본 외모만으로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그는 고집이 있었다. 아는 사람을 동원해 군예대 소속 군인의 추천을 받아 간신히 입대를 했고 그로부터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것은 꿈의 길이 아니라 가난과 고생길의 시작이었다.

 

 

 


제대후 인기 스타들이 모여드는 충무로와 스카라극장 부근을 배회하다가 만난 사람이 당시 쇼단의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린 김정남씨였다. 김씨의 도움으로 일류 쇼단인 오향(五鄕)의 단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쇼단에서 이주일의 역할은 사회자가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났을 때 대역을 맡거나 단원들의 짐을 들어주고 양말을 빨아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이미 처자식까지 둔 처지에 유랑 쇼단의 머슴살이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설득으로 당시 철제가구로 인기로 모았던 캐비넷 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7년 어느날 서울 을지로 길가에서 과거 친분을 나눈 코미디언 방일수를 만났다. 연예계에 미련이 남아있던 그에게 방일수는 월남위문공연단에 참가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외국 구경을 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월남에갔으나 돌아올 때는 빈털터리였다. 워낙 돈이 궁해서 용돈 주는 아가씨와 잠시 데이트를 해 순진한 아내의 속을 섞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월세 3백원짜리 상계동 판자집에서 살 때 부인 제화자씨가 품삯 일로 끼니를 이어갔다. 이주일은 유랑쇼단을 따라 다니며 사흘이 멀다하고 집을 비웠고 때로는 밥값을 못내 옷을 잡히고 속옷바람으로 귀가하는 때도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빛을 보기 전까지 20년간 화장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주일은 1973년에 겪은 일을 ‘못생겨서 한이 된 가장 슬픈 해’로 떠올렸었다. 그해 겨울, 인기 절정의 가수 남진의 지방 리사이틀에 김정남씨의 배려로 보조 사회자가 되어 동행할 기회가 왔다. 잘만하면 화려한 쇼무대에서 얼굴을 내밀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내에게 큰소리 쳐놓고 새벽 5시에 쇼단의 출발 장소로 달려간 이주일은 쇼단 연출감독에 의해 한가닥 그 꿈마저 무참하게 깨어졌다. 이주일을 처음 본 감독은 ‘구경하던 사람도 다 도망간다. 저 얼굴을 어떻게 무대에 세워’라면서 쇼단 버스에서 내몰았다. 그런 일은 그 후에도 여러번 발생해 그를 울렸다. 추천을 받아 쇼단 단장에게 인사를 하면 몇마디 묻지도 않고 단장은 동행한 추천자만 남게 하고 그를 문밖으로 내보냈다. 그 즉시 추천자에게 ‘사람을 소개할려면 제대로 생긴 놈을 데려와. 저 얼굴로 뭘해’라는 소리가 문밖으로 쩌렁쩌렁 들렸다.

 

 

이윽고 그에게도 기회는 왔다. 하춘화 쇼단에 들어가면서 쓸만한 사회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쇼단장이었던 최봉호씨를 만났을 때도 처음에는 거절을 당했다. 그 사이 3류 밤무대를 떠돌며 호구지책으로 돈벌이를 하다가 두 번째 최봉호씨와 상면하면서 승낙을 받아냈고 이어서 이리역 화물열차 폭발사고 때 공연중에 쓰러진 하춘화를 구해내면서 최봉호씨와 인간적인 유대를 맺게 되었다. 그 때 이주일도 머리가 깨어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하춘화의 이름에 묻혀 용기 있는 사나이 정도의 토막기사에 그칠 정도였다. 하춘화와 나란히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을 때도 무명 연예인 이주일의 병실에는 가족밖에 찾아 오지 않았다. 그의 아들이 하춘화의 병실 복도를 메운 화분 한 개를 슬쩍 가져와 아버지의 병상머리에 놓고 ‘아빠 꽃 예쁘지’하고 위로해 줄만큼 이주일은 쓸쓸한 연예인이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는 마침내 나이 40에 그 사무치는 콤플렉스를 화려한 장점, 성공의 무기로 뒤집어 대박인생의 길로 접어든다. 인생 역전의 극적인 순간도 코미디처럼 드라마틱하게 찾아왔다.


이주일은 가수 매니저먼트 사업과 음반제작 사업을 하는 삼호프로모션 대표 최봉호씨의 지원으로 MBC-TV 코미디프로에 꼭 한번 스쳐가는 얼굴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인기 코미디언들의 틈에서 대사 한마디 없는 연기였고 그것도 담당 연출자가 바뀌면서 더 이상 출연할 기회가 사라졌다.


다시 줄이 닿은 곳이 TBC-TV(현 KBS-2TV) ‘야,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신설 프로. 이 프로에서도 무명의 늙은 신인 이주일은 얻어맞고 지나가는 엑스트라 정도의 역할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이 프로가 이주일을 위한 프로로 뒤집어진 것이다. 1980년 2월의 일이다. 사람 팔자는 시간문제였다. 출연 첫날 녹화현장에서 장시간을 기다려도 끼워주지를 않자 무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만 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곽규석이 너는 뭘하러 왔느냐고 심심풀이 농을 건넸다. 바로 이때 이주일은 겸연쩍게 뒤뚱거리는 특유의 제스츄어로 “나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데..”라며 신세타령을 했다. 그것은 그에게 매우 진지한 항변이었으나 보는 사람들에게는 멋진 코미디였다. 잠시 웃음 바다가 됐다.


프로듀서는 센스가 있었다. 바로 대본에 없는 이주일의 실연 코미디를 그대로 카메라에 넣었다. 그 한토막의 코너가 폭발했다. 시청자들은 처음 본 못생긴 중년 코미디언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거무튀튀한 피부에 겉늙어 보이는 면상, 엉성한 대머리, 뱁새눈에 푹 우그러진 콧등. 이주일의 특별한 마스크와 우스꽝스런 동작, ‘못생겨서 미안하다’는 멘트는 유행어로 불이 붙었다. 불과 일주일만에 이주일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그로부터 4개월만인 1980년 6월께 기자는 금호동 산비탈에 있는 열댓평짜리 간이주택인 그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집 앞에는 그를 보고싶어 하는 동네 어린이들이 쉴새없이 몰려들었고 주인부부는 곧 강남에 새로 산 110평짜리 대지의 2층 주택으로 이사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그가 기자에게 들려준 고백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몇손가락에 꼽히는 어느 재벌이 “우리 집에 소아마비 아이가 있는데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 하니 우리 집으로 꼭 좀 올 수 없느냐”는 간곡한 제의를 받아놓고 너무 바빠 미루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는 그렇게 황금의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매니저먼트사에서 전속금 억대를 받아내고 CF 영화출연 쇼공연 음반제작 TV출연 등으로 국내 연예인중 최고액을 받는 슈퍼스타로 분주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 편당 출연료로 집한채가 생길 정도였다.


이주일이 나타나는 곳마다 인파가 몰려 비명을 질러댔다. 알고보면 그는 신인이 아니다. 20여년간 피눈물 나는 3류 연기인생을 살면서 축적한 재능을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 뿐이다. 그래서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가 쉽게 사라지는 젊은 신인들과 달리 그의 인기는 재능이 밑받침 되어 숨이 길고 저력이 있었다.

 

 

 

 

TV 데뷔 초기 그의 이름은 李周一 李朱一 李週一 등 대여섯 개의 예명이 쏟아져 나왔다. 일주일만에 스타가 되었다고 ‘李週一이 가장 적절한 예명’이라는 말도 따랐다. 당신 이름이 어느 게 정확하느냐는 질문에 이주일은 말했다.


“유명해서 이름이 많아진 건데 어느 것을 불러도 싫지 않다. 내이름이 헷갈린다고 사람이 나를 몰라보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 신경 안쓴다. 당신 멋대로 불러도 괜찮다.”


이주일(李朱一)은 본명이 정주일(鄭周逸)이다. 왜 성을 바꾸고 한자이름도 바꾸었는지에 대한 유래가 그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흥미도 갖지 않았다. 정치인이 되면서 정주일로 돌아갔지만 그는 곧 이주일로 복귀해 타계하기 전까지 비교적 안정된 상류사회의 명사로 살았다.


이주일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팔자를 고쳐준 ‘뭔가를 보여드리겠다’는 코미디 주제처럼 세상에 뭔가를 남기고 떠났다.


기자는 한때 대학에서 ‘연기자론’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연기자의 외형적 유형을 미남 신성일, 보통 남자 안성기, 못생긴 이주일을 표본인물로 정해 그들의 성장과 성공의 특장을 한부분의 비교 컨텐츠로 활용한 바 있다. 이주일의 출세기는 개성과 재능을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필요로 하는 이 시대 연예인 지망생들의 표본적인 이야기가 된다.

<명동부루스/이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