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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a - Paul Anka

무정애환 2011. 9. 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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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da 출신의 Singer & Songwriter "Paul Anka"

1950년대 Canda 출신의 Singer & Songwriter "Paul Anka". 불멸의 히트곡 'Diana', 아마도 지공세대인 우리들은 이곡을 모르시는 분들은 안 계실 것입니다. 곡이 흥겹고 경쾌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Paul Anka"의 최대 히트곡입니다.

이 곡이 발표됐을 때가 1957년도인데 그해 막 군에 입대하였을 때입니다. "Paul Anka"의 나이는 15세였습니다. 그는 이 노래로 단숨에 팝스타의 자리로 등극했고 "바비 라이델(Bobby Rydel)" 등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었죠. "Diana"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대단하여 "삼천만의 노래"라는 상투문구가 유행할 정도로 당시 젊은이들은 한 번쯤은 불러볼 정도로 대히트 했었습니다.

1941년 "Canada의 Ottawa" 태생의 "Paul Anka"는 이미 12세 때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1957년 캐나다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이주를 했으며. 이 노래는 연상의 보모에 대한 소년의 짝사랑을 담은 노래 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또한 "Paul Anka"는 1950년대 Rock 'N' Roll 과 Country 음악의 결합인 "Rockabilly" 전성시대에 "멜로 보이스 (mellow voice)"의 효시로 등장해 "아이돌스타(Idol star)"로 급부상했습니다. 이후 세계적인 Musician이자 가장 성공한 Singer & Songwriter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6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치고 있답니다.

그동안 125장의 음반을 발매했고 이중 10개 이상의 음반이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일본, 이탈리아 등 전세계 에서 1천5백만 장이 팔렸답니다. 그의 음악은 세계에서 8초마다 한번씩 울려퍼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합니다.

대표곡으로는 "Diana", "Lonely Boy", "You are My Destiny", "Puppy Love", "Crazy Love", "Papa"등 세대를 초월한 팝 명곡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몇 번에 걸쳐서 내한공연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요... ~ applejack ~ 입니다



이음악은 Daum Cafe에서 사용하는 저작권 의심여부 (Daum Cafe Filtering System)에 여과(濾過)한 Pop 음악입니다

Pap - Paul Anka




Papa - Paul Anka

Every day my Papa worked
to help to make ends meet,
to see what we would eat,
keep those shoes upon my feet

Every night my Papa
would take and tuck me in my bed,
kiss me on my head
after all my prayers were said

Growing up with him
was easy time just flew on by.
The years began to fly through
his age and so did I

I could tell that Mama wasn"t well.
Papa knew and deep down
so did she, so did she

When she died,
Papa broke down and cried.
All he said was
"God, why not take me?"

Every night he sat there sleeping
in his rocking chair.
He never went upstairs,
Oh, because she wasn"t there

Then one  day my Papa said
"Son, I"m proud the way you grow,
Make it on your own.
Oh, I"ll be okay alone"

Every time I kiss my children
Papa"s words ring true
"Your children live through you.
They"ll grow and leave you, too"

I remember every word
My papa used to say
I live them everyday
He taught me well that way

Every night my papa would take
And tuck me in my bed
Kiss me on my head
When my prayers were said

Every night my papa would take
And tuck me in my bed
Tuck me in my bed



매일 아버지는
우리를 먹여살리고
신발을 계속 신겨주기 위해
변함없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하셨지요

매일밤 아버지께서는
날 침대로 데려가 이불을 덮어주시곤 했지요
내기도가 끝난후에는
내 머리에 키스를 해주셨지요

아버지와 함깨 자란건
그저 편안하게 흘러간 시간이었어요
세월은 빠르게 흘러
아버지도 나도 나이가 들기 시작했지요

난 어머니께서 건강하지 않으시다고 말했어요
아버지는 내심 알고 계셨던 거죠
엄마도 알고 계셨던거에요

엄마가 돌아가셨을때
아버지는 주저 앉아 울고 말았어요
아버지가 오로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이시여,왜 날 데려가지 않으셨어요"

매일 밤 아버지는
흔들의자에 앉아 잠이 드셨어요
결코 윗층으로는 올라가시지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아들아, 난 너의 자라는 모습이 자랑스럽단다
이젠 네 마음대로 하렴
난 이제 혼자 괜찮을거란다"

내가 아이들에게 입맞춤할때 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정말 들리는것 같아요
"아이들이 너의 그늘아래 살지만
그들도 자라서 역시 너의 곁을 떠날거란다"

난 아버지께서 해주시던
모든 말들이 기억나요
닌 매일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살고있죠
내게 그 방법을 잘 가르쳐 주셨던거에요

매일밤 아버지께서는 날 침대로 데려가
이불을 덮어주신곤 했지요.
내 기도가 끝난후에는
내 머리에 키스를 해주셨지요.

매일밤 아버지께서는 날 침대로 데려가
이불을 덮어주신곤 했지요.
이불을 덮어주신곤 했지요.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금강산을 유람한 아들~~!!

온몸 피멍에도 "아버지 마음껏 구경 기뻐"

[중앙일보]

아흔을 넘긴 아버지를 지게에 태워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아들, 혼자서 오르기도 힘들다는 금강산을 아버지를 모시고, 그것도 지게에 태워 관광을 다녀온 이군익(42)씨 이씨는 아버지를 지게에 모시고 금강산을 오르는 사진이 한 언론사의 독자투고란에 실리면서 인터넷상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이씨를 인천에서 23일 만났다.

금강산 가믄, 1만2000봉에 8만여남으개 암자가 있다던디…." 지난 봄, 아버지 이선주(92) 씨가 독립기념관 나들이 길에 언뜻 금강산 얘기를 꺼내셨다.


한 해 전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신 아버지가 적적해하실까 싶어 한창 산으로 들로 모시고 다니던 때다 "중학교 다닐적에 집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지요 충남 서산 빈농에서 자랐습니다.

7남매의 막내인 저까지 대학 공부를 시키시느라고 평생 허리 한 번 못 피신 아버지 십니다.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예 아버지, 금강산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짐했지요." 6월 아버님 생신에 즈음해 금강산 여행을 보내드리자고 형제들과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산에 오르시는 건 불가능한 일, 산 길이니 휠체어도 무용지물일 터였다. "어떻게하면 아버지께서 금강산 절경을 마음껏 눈에 담으실 수 있을까, 며칠 밤을 고민했습니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가면 될 것 같은데, 기력이 쇠진하시니 아들을 단단히 붙드시지 못할 일이걱정이고… 그런데 번뜩 산에서 나무하던 생각이 나는겁니다.

"불현듯 어릴적 지게지고 산에 올라 나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지게에 아버지 의자를 만들면 되겠구나 나무 지게는 무게 때문에 여행 내내 지기 어려울 듯했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가볍고 강한 알루미늄 지게 그 때부터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지게를 만들기 위해 설계도를 그려 지게를 만들어 줄 기술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모두들 '못 만든다'며 손사래를 치거나 터무니없는 공임을 요구했다.


집과 직장이 있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 곳곳을 뒤져가며 한 달여 동안 임자를 찾아다녔지만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지게"를 만들어주겠다는 기술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일을 헤맨끝에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등산용 지게에 특수용접을 해 금강산 유람을 위한 "아버지 전용 지게"가 탄생했다. 지게 지느라 온 몸 피멍… "아버지 좋아하시니 기쁘기만해".

북측 안내원이 지게를 보고 정색을 하며 뭐냐고 묻는겁니다. 아버님 모실 지게라고 했더니 연세를 묻더군요 아흔 둘에 아들 등에 업혀 금강산 가신다고 했더니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럽디다.

"하하하 통과하시라요!".

지게와 그 위에 앉으신 아버지 덕분에 여행 내내 이씨 일행은 단연 스타였다. 초여름 날씨에 혼자 걷기도 험한 산 길을 아버지와 한 몸이 되어 오르는 이 씨를 보며, 연배 높은 관광객들은 이 씨 일행을 만날 때마다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젊은이들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이 씨가 아버지를 업고 한 발 한 발 떼는 모습에 시선을 모았다. 함께 금강산에 오른 큰 누나 이춘익(62)씨와 형 이관익(55)씨도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막내 동생의효행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아버지를 업고 천선대로 귀면암으로, 구룡폭포로….이 씨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에게 짐이 될까 한사코 업히기를 거부하시던 아버지도 "저기가면 뭐가 있다냐?" "아이고, 저게 그림이여 경치여." 질문에 감탄사를 연발하시며 어느덧 금강산 구경에 흠뻑 취하셨다.

지게 무게는 줄잡아 15kg이상. 아버지가 올라앉으시면 60kg이 넘는다 이씨는 "산행이 이어지면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어깨와 팔이 뻗뻗하게 굳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어린애 모양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고 말했다.

금강산 온천에 갔더니 동행한 우리 형님이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지게 지는 동안 실핏줄이 터졌는지 상반신 전체가 거의 피멍이더라구요. 형님이 울컥하시는데, 제가 웃자고 했습니다.

아흔 넘으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금강산 구경을 마음껏 하셨는데, 얼마나 좋냐구요. 이씨 집 마당 한 켠의 작은 정자에서 가슴 따뜻한 금강산 유람기를 듣는 동안 말귀 어두운 그의 노부는 묵직한 감동이 담긴 아들의 얘길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불혹을 넘긴 아들을 두고 우리 막내가 일곱 놈 중에 제일 이뻐. 제일구엽고 아버지라면 아주…. 충남 서산서 평생 농사만 지어먹은 내가 아, 남한 땅 안 밟어본 디가 없고 금강산까지 구경했으니 갈 데도 없는겨 인제. 라며 효심 깊은 아들 자랑에 입이 말랐다.

이 모습을 이 씨의 아내 이연희(39)씨도 시종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아버지를 어릴적 여읜 친정아버지로 여긴다는, 시어머니 임종전까지 성심으로 병수발을 했다던 이씨의 착한 아내 뒤에선 여덟살 손녀 수연이가 할아버지! 그만하고 인제 같이 놀아요!를 외치며 바짓자락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얼마나 감동을 주기위해 작은 고민이라도 해봤었는지... 사랑은 느끼며 잊지않고 감동으로 갚아야 함을...
너무나 感動的인 사연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요...
                                                                  [애풀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