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는 남도
(안치환/글,가락)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남도 한라산이여 |
제주도 4.3 항쟁을 그린 노래. 미제국주의자들과 과거에 친일이었으면서 항쟁 당시 친미로 돌아선 남한의 군인과 경찰병력에 맞서 주저없이 山사람(빨치산)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게 싸웠던 제주도의 민중들, 무차별한 수만의 양민학살, 그리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 등은 제주도를 잠들 수 없는 남도로 노래하게 한다.
출처 :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10집' - '노래운동 15주년 기념' 노래 & 악보 가사집에서 |
[대중음악 100대 명반] 53위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
ㆍ진보 노래운동, 대중음악으로 진입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2’는 진보적 노래운동의 성과가 상업적 대중가요 음반 시장 안에 의도적으로 진입해 성공한,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기념비적 음반이다. 이 음반이 나오기 5년 전 발매된 노찾사 1집에서 그 시작이 이뤄졌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는 몇 가지 점에서 미흡하다. 우선 진보적 노래운동과 민중가요의 대중가요 시장 진입이 그리 의도적,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84년 노찾사 1집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노래집단이 없는 상태에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고 있던 최초의 노래운동 집단 노래모임 ‘새벽’의 멤버들이 김민기와 함께 우연히 만들어낸 프로젝트 음반이며, 무사히 발매되는 것이 최우선의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민중가요의 최고 레퍼토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엄혹한 검열에 통과할 만큼 무난한 노래들이 선택됐다.
그에 비해 노찾사 2집은 87년 6월 항쟁으로 부분적인 민주화의 분위기가 생겨난 후, 노래운동의 대중화를 목표로 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노래집단을 발족시키고 여러 차례의 공연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축적한 후에 만들어낸 본격적인 첫 음반이라는 점에서 노찾사 1집과 구별된다.
노찾사의 활동과 2집 음반의 발매로 드디어 이전의 비의도적인 사건들이 모두 필연적인 ‘확신범’의 소행으로 바뀌었다. 1집의 음반 이름이 팀 이름으로 바뀐 것은 물론 그간 노래운동이 시민공간에서 해왔던 간헐적 활동들은 모두 노찾사를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운 소쩍새’로 정리됐다.
창립 이후 노찾사는 공연 때마다 매진행진을 계속했다. 대중가요와 다른 경향의 민중가요가 얼마나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했다는 점에서, 이 음반은 발매 이전에 이미 준비된 ‘대박상품’이기도 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1년 사이 50만장을 돌파했고 이후 90년대 초중반까지 80만장 이상 판매됐다.
이 음반의 수록곡은 9곡 모두 노래모임 ‘새벽’ 멤버들(문승현, 문대현, 안치환, 류형수)이 지은 작품으로 당시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던 유명 민중가요였다. 음반은 노래 발표의 시작이 아니라 화려한 유통의 기록이었다. 수록곡들은 당시의 검열 기준에 비춰보면 과감한 표현들로 뒤덮여 있다. ‘민주의 넋’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등의 구절은 다른 대중가요였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표현들이다. 이미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렸던 이 작품들을 지켜보는 대중들의 눈이 무서워, 엄혹한 검열당국도 손을 대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편곡을 비롯해 음악 전체를 관할한, 따로또같이 출신의 나동민은 키보드를 중심으로 한 매끈하고 윤기 있는 질감을 만들어내 노래모임 새벽의 비합법음반에서와는 다른 노찾사만의 대중적인 색깔을 만들었다. 노찾사 가수들은 개인의 색깔 대신 노찾사라는 집단의 색깔만을 보여줬다. 그래도 ‘광야에서’와 ‘잠들지 않은 남도’를 부른 안치환과 ‘저 평등의 땅에’ ‘사계’ 솔로 부분의 권진원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것은, 90년대 언더그라운드 스타들의 전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들을 거리이기도 하다.
〈 이영미 | 대중예술연구자 〉2008년 03월 06일 인터넷 경향신문 |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
존경하는 이웃지기 굴렁쇠님의 <제주 4.3의 슬픈 증언> 시리즈를 가슴으로 읽으면서 5년 전에 읽었던 내용이 생각나서 책을 뒤적거려 보았다.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1> -전쟁, 냉전과 마이너리티, <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2>-국가폭력과 트라우마 라는 부제가 달린 2001년 삼인출판사가 펴낸 책을 선배가 두 권 보내주었다. <제주 4.3의 현재적 과제와 전망>이라는 김영훈(4.3 특별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상임공동대표)님의 글이 16쪽에 걸쳐 실려 있다. 굴렁쇠님의 글을 읽으면서, 15가지의 사례 중에서 전율했던 슬픈 기억과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라는 시를 떠올렸다.
1948년 12월 15일 호근동에 공비습격으로 집이 불타고 여러 명이 공비에 의해 살상 당하자 토벌대가 격분한 나머지 공비들을 토벌하다가 10여 일 후에 공비습격으로 희생자 고별식을 하기로 해서 호근동 위 속칭 서치모루에서 숨어 있는 20대 젊은 남녀 2명을 데려다가 철봉에(서호초등학교 교정) 완전 나체로 결박하고 고별식이 끝난 후 무로 여자의 음부에 무차별 삽입 등을 하면서 도저히 참혹한 짓을 하다가 공비 습격으로 피해를 당한 유가족에게 분풀이로 죽창으로 살해토록 하여 완전 나체 상태인 젊은 남녀를 참살케 함.(사례12) |
50년 전 무자(戊子). 기축년(己丑年) 한라산에서 군경의 쏜 총에 억울하게 나는 죽어 무정한 세월 피묻은 옷에 고이 싸서 여기 살의 노래 몇 글자 적어봅니다. 이제 나의 살은 썩었습니다. 어머니, 나의 살은 썩어서 흙이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이 왔습니다. 미군이 오고, 군인이 오고, 지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오고, 모두 무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 나는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산에 숨었다 잡히어 빨갱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 하였습니다. 빨갱이가 아니라면 산에서 잡혀온 다른 빨갱이를 이 죽창으로 죽이라 하였습니다. 눈감고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반은 미쳐 내 이웃을 향하여 죽창을 들고 찔렀습니다. 피묻은 죽창을 들고 내가 미쳐서 소리지를 때, 희미한 여명 속에 “겨누어 총! 쏘아!”하는 소리 반복되고 사람들은 허망하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모두 구덩이에 처박아 휘발유를 뿌려! 어머니, 그 시국에 우리는, 제주 땅에 태어난 죄로 허망하게 쓰러져야 하였습니다. 이제, 나의 살은 부정하여, 이승도 저승도 오도 가도 못하여 어머니, 나는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의 노래입니다. 내가 부르는 무자(戊子). 기축년(己丑年) 피의 노래입니다. 어머니, 태양은 떠도 캄캄한 이 세상 피로 물들고 미친 듯 울어대는 바람 까마귀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
어머니, 그날 우린 밤에 산에서 내려, 가물개 친척집에 곱았수다. 와흘리(臥屹里)로 올라가는 곳에 비크럭밧이 있었는데, 오맹이루라 합니다. 길 서녘에 우리 밭이 있고 밭에는 굴이 있어 남편은 거기 숨었지요. 내려가면 우릴 수용소 생활시키다 죽여버린다니, 남편은 거기 숨어 있었던 거지요. 당신 하나 희생할 셈치고 같이 내려가요. 운이 따르면 같이 살기로 하고, 그럴 셈치고 내려가자고 애원했으나, 남편은 산에 간 개똥이 아버지랑 동네 청년들 보기가 부끄럽다고, 굳이 내려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쌍년 의리가 있지 나만 내려가면 되나? 무슨 의리가 밥 먹여 준대요. 목숨은 하나 뿐이우다. 그래서 우린 내려왔지요. 내려와 뒷날 날이 밝으니 삐라가 하얗게 뿌려져 있었어요. “강태봉이 이 새끼 너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한 일주일은 됐어요. 조천 비석거리 그 앞은 공회당이었는데, 거기 모두 모이라 해요. 도(道)에서 나와 연설도 하고 그런 저런 말을 하다 보니 어두워집디다. 늙은이하고 아이들은 돌아가라 해서 우린 돌아와 버렸지요. 어두워도 남편은 안 오기에, 왜 안 오나 하고 있는데 함덕 대대본부 9연대가 와서 통행증 없는 사람들 통행증 내주겠다며 모두들 실어 갔다고 해요... 함덕가며, 내일은 폭도들 잡으러 산에 오른다 하더니, 그 날 함덕 잡혀간 사람은 차에 실려, 박성내 다리에 가서, 총을 쏘아, 전부 죽여서, 굴헝에 처박아, 멸치젓 담듯 처박아, 죽여버렸대요! |
어머니, 제주 것들, 붉은 섬 빨갱이들, 10만의 목숨은 휘발유를 뿌려 죽여도 좋다는 그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제주 섬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도깨비 불 사방으로 번져가고, 피 바람에, 내 온 몸은 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뜨거워 소리쳤습니다. “살려줍서-” 그러나 나의 노래는 기름불에 활활 타 들어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이제랑 그 날 내가 남긴 피 묻은 옷을 보고 나를 찾아 주세요. 이제 세월은 흐르고, 살은 썩고 녹아 흙이 되었지만, 한라산 곶자왈(荒野) 굴헝마다 굴러다니는 뼈의 노래를 부를까 해요. 시신은 눈알 터지고, 바람 까마귀 떼, 황량한 들판을 날아갑니다. 어머니, 육신은 갈기갈기 찢겨 까마귀밥이 되었고, 나의 뼈, 내 육신을 지탱하던 순 제주산(濟州産) 나의 뼈, 북촌에 하나, 원동에 하나, 표선백사장에 하나, 정방폭포에 하나 해뜨는 일출봉에 하나, 알뜨르 비행장, 정뜨르 비행장 아스팔트 밑에, 그리고 박성내 다리 아래, 여기 저기,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내 영혼, 이승도 저승도 못간 내 영혼 어디에 머물러야 합니까. 뼈를 잇고 살을 붙여 피를 돌게 하고, 이 한 몸 이승에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면, 밥 배불리 먹는 거, 옷 따뜻하게 입는 게 소원입니다. 어머니,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린 가난 때문에 황량한 겨울 한라산으로 내몰렸던 겁니다. 토끼몰이 사람사냥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
허공 중에 흩어진 넋이여, 살은 썩고 녹아 흙이 되고, 뼈로 남은 혼백이여, 북촌 옴탕밧에서 죽어간 영혼이여, 알뜨르 비행장에서, 표선백사장에서, 원동 주막번대기에서 총살당한 조상들이여, 기름불에 타 형체마저 녹아버린 육신이여, 그날 박성내 다리에서 “살려줍서!” “살려줍서!” “살려줍서!”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무자(戊子). 기축년(己丑年)의 사람들이여, 여기 오셔서 원미 한 그릇 소주에 계란 안주 잡수고 갑서, 설운 조상 손목잡고 엉엉 실컷 울고 가옵소서. 눈물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시고, 땀 든 의장 뼈를 싸 얼었던 몸 녹히고, 얼은 마음 풀어서, 저승 상마을로 가 나비로나 환생 헙서. 원통하고 칭원한 영신님네, 인간의 삼혼 중에 한 넋만 없어져도 검뉴울 꽃 되는 법이오니, 허공 중에 떠도는 넋 차사영신기 둘러받아 초혼(初魂) 이혼(二魂) 삼혼(三魂)을 씌우려합네다. 불쌍한 영신님네, 초혼을 씌우져 합네다. 초혼 돌아옵서 초혼 본- 이혼을 씌우져 합네다. 이혼 돌아옵서 이혼 본- 삼혼을 씌우져 합네다. 삼혼 돌아옵서 삼혼 본-
- 문무병, <살의 노래, 피의 노래, 뼈의 노래> 전문 |
왕조시대의 정치문화에 젖은 이승만은 마키아벨리적인 인물이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잔인성을 권력의 한 속성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위해(危害)를 끼칠 때는 복수의 위험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민중에게는 머리를 어루만져 주던가 없애버리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민중들은 “보잘 것 없는 모욕에 대해서는 복수하려 들지만, 큰 모욕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하려 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전쟁에서의 잔혹함은 권력유지의 대단히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제주 4.3항쟁 당시에도 그랬듯이 강간이나 학살 후 불에 태워 죽이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들을 완전히 없애서 이들의 가족이나 친지가 다시는 대항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감히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것은 단지 군인들이 현장에서 갖는 감정적인 보복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학살의 정치학‘이다. (전쟁과 사회, 돌배게, 259쪽) |
제주 4.3은 해방공간인 미군정 시기에 벌어졌던 한반도의 분단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만 변방이었던 제주 땅을 빌어서 나타났던 일이었고 그 와중에 수만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김동춘 교수가 <전쟁과 사회>에서 밝혔듯이, 1948년 8월 24일 미군정의 종료로 형식적인 군사적 주권을 획득했지만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로 인해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여전히 모든 작전권을 미군이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48년 후반 본격적인 초토화작전이 이루어졌던 제주 4.3항쟁 진압군의 무리한 토벌작전 수행의 경우도 여전히 미군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제주 4.3항쟁에서처럼 ‘반공의 보루'를 쌓기 위해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종용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자신들에게 공격의 화살이 돌아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군과 극우청년단이 좌익을 청소하는 작업을 배후에서 지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형식적인 군사 주권을 가진 정부수립 이전시기에는 학살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되도록 모든 책임을 한국정부와 군에게 떠넘겼다. 미군사고문단이 연대나 대대 단위까지 상주하면서 모든 작전과정을 지켜보고 일일이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제주 4.3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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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에 대한 초토화작전에서 시작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규모면에서 유대인의 학살, 홀로코스트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잔인성에 있어서 20세기의 국제전이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다른 어떤 학살을 능가한다. 이 학살은 무자비한 살인과 강간, 재산의 탈취, 피학살자를 거의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쟁 백화점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살아있는 인권박물관이자 교과서였다.
물질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인권의 측면에서도 진보를 이루었다는 20세기. 하지만 국가와 ‘국가이익’이라는 명목 아래 진행된 폭력의 규모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국가폭력이 인간의 삶에 드리운 트라우마 역시 그 크기를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제주 4.3도 그렇고, 광주도 그렇고, 평택 대추리도 그렇다.
* 굴렁쇠님의 제주 4.3에 대한 일련의 작업에 이웃지기로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또한, 분노하고 가슴으로 피울음을 울면서 하는 힘들고 외로운 작업이기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4.3문제의 해결이 한반도의 통일시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이고, 인권이 이 땅에서 살아 숨쉬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굴렁쇠님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다. 그의 제주 4.3 진실캐기는 계속 되어야만 한다. / 돌팔이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