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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편지 / 나훈아

무정애환 2012. 2. 24. 01:20

 

 

 




전쟁이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했다.

유치원에 다녔어야 할 나이의 어린이가
깡통을 들고 거리에 떠돌며
낯선 얼굴들에게 손바닥을 벌려야 했었다.








나무뿌리라도 먹어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잡초보다 모질게 살아남아야 했다.

아이를 업은 소녀의 손에 쥐어진 나무뿌리는
이 가족의 땔감일까? 아니면, 한 끼 식사일까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골목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전쟁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이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속으로 달려 왔고
세계속에 의지의 한국인으로 살아 남았다.








부모님은 피난통에 돌아가시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다 부서져 폐허가 된 터에
어린 소년이 버려진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고난의 1950년대를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눈물어린 단면이다.








찬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헛간이라도 좋았다.

행색은 초라해도 카메라를 신기한듯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매의 자매들은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자화상이었다.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누더기가 다 된 솜바지라도 행복했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우리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의 꽃제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뱃대를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의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뱃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었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래야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디낼 수 있었을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 나는 포연 자욱한 전쟁터
이들에게는 그저 스쳐간 한낮 일장춘몽이었을까?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사라져갔다.








물따라, 바람따라 그렇게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하나씩.. 둘씩..

모두 다, 잊혀져 갔고,

모두 다, 잊고만 싶었던 세월들..


그러나, 결코..

하나도, 잊을 수도 없고,

하나도, 잊어서는 아니 될

우리들의 아픈 상처이자, 슬픈 자화상이었다.






 

대동강아 내가 왔다
을밀대야 내가 왔다
우표없는 편지속에
한세월을 묻어놓고
지금은 낯설은
나그네되어
칠백리 고향길을
찾아왔다고
못본체마라 못본체마라
반겨주렴아
대동강아 내가 왔다
부벽루야 내가 왔다
주소없는 겉봉투에
너의 얼굴 그리다가
눈보라 치던밤
달도없던 밤
울면서 떠난길을
돌아왔다고
못본체하네 못본체하네
반겨주렴아



 

1947년 부산광역시동구 초량동에서 무역상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생인 형을 따라 1965년 상경해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66년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천리길>이라는 곡을 받아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독특한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그는 1968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곡이 인기를 얻었고 1971년에는 <고향역>, <머나먼 고향>이라는 곡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에 주력하며 당시 최고의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한국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특히 남진과 나훈아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료로서 가수왕을 독점 하였다.

 

 

전성기를 맞이한 1972년에는 나훈아가 공연중에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 남진의 팬들이 저질렀다는 루머가 퍼져 공연 도중에

남진 팬과 나훈아 팬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만큼 폭발적인 인기 가수였다는 것이다.

76년, 77년에 내놓은 곡들이 모두 히트하였으나 그 뒤로는 잠잠했던 나훈아는

1981년에 <대동강 편지>라는 곡으로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고

1986년에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개인 소속사를 만들며 또 한번의 기회를 노렸다.

이로써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자작한 <무시로>라는 곡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1990), <영영> (1990),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1999) 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이전 만큼보다는 활동이 뜸했으나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한국의 대표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으로

이미 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그는 2008년1월,

나훈아 잠적과 동시에 일본의 야쿠자가 나훈아를 폭행했다는 등 각종 루머가 퍼졌다.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통해 루머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 이후로는 콘서트, 공연, 무대 등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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