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부산광역시동구 초량동에서 무역상 아버지와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생인 형을 따라 1965년 상경해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66년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천리길>이라는 곡을 받아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독특한 창법이 매력적이었던 그는 1968년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라는 곡이 인기를 얻었고 1971년에는 <고향역>, <머나먼 고향>이라는 곡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에 주력하며 당시 최고의 가수
남진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이뤄 한국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특히 남진과 나훈아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료로서 가수왕을 독점 하였다.
전성기를 맞이한 1972년에는 나훈아가 공연중에 피습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때 남진의 팬들이 저질렀다는 루머가 퍼져 공연 도중에
남진 팬과 나훈아 팬들끼리 패싸움이 벌어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만큼 폭발적인 인기 가수였다는 것이다.
76년, 77년에 내놓은 곡들이 모두 히트하였으나 그 뒤로는 잠잠했던 나훈아는
1981년에 <대동강 편지>라는 곡으로 MBC 10대 가수 특별가수상을 수상하고
1986년에 아라기획을 설립하여 개인 소속사를 만들며 또 한번의 기회를 노렸다.
이로써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자작한 <무시로>라는 곡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1990), <영영> (1990),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1999) 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이전 만큼보다는 활동이 뜸했으나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한국의 대표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으로
이미 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었던 것이다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그는 2008년1월,
나훈아 잠적과 동시에 일본의 야쿠자가 나훈아를 폭행했다는 등 각종 루머가 퍼졌다.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통해 루머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 이후로는 콘서트, 공연, 무대 등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