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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창작 판소리 '오적'(五賊)

무정애환 2012. 6. 27. 20:07

 

김지하 창작 판소리 '오적'(五賊)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1. 오적의 사회적 배경을 이야기 하는 대목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2. 도둑시합하는 대목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3. 포도대장이 애꿎은 꾀수만 닦달하는 대목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4. 포도대장 출도 대목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5. 오적의 작태 대목
김지하 판소리 '오적'(五賊) 6. 꾀수가 가막소로 끌려가는 대목
<퍼온글>
김지하 창작 판소리 '오적'(五賊) 
판소리 '오적'(五賊)의 관련 글과 음악을 듣기 전에... 
김지하시인의 91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고문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와 관련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 후 10여년이 지나서 그 당시의 발언에 대해 나름의 해명을 하였으나 
그 해명 조차 단순한 변명에 지나지 않은 안타까움이 있으나, 
이 작품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예리하게 풍자한 뛰어난 작품으로서 이 작품과 관련한 글만 올립니다. 
김지하의 담시가 지닌 문화적 의의 
1970년 발표되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 우리민족의 저 빛나는 
판소리의 미학을 창조적이고도 천제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비롯하여 '똥바다' 
'소리내역' 등은 오랜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 지하로만 맴돌다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완전한 복권을 이루게 된다. 
실로 첫 담시 오적(五賊)의 발표이후 거의 4반세기 만에 화창한 햇빛을 보게 되는 김지하의 '탁 트인 
현대적 창작 판소리' 인 담시의 이 테이프 및 음반은 독재정권에 탄압 받고 유실될 뻔한 김지하 담시의 
역사적 복권을 알리는 첫 계기이자 우리민족의 전통 판소리의 탁월성을 자랑스럽게 확인케 하는 
그야말로 민족문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거대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다.
지난 1980년대 국내외에서 모두 160여 회에 걸쳐 담시공연을 가짐으로서 담시의 예술적 위대함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출중한 소리꾼 임진택과 뛰어난 고수(鼓手) 이규호에 의해 판소리로 불린 
이 테이프 및 음반을 통해 많은 대중이 판소리와 담시의 예술적 위대함을 깨닫기를 바라며 
이러한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 작업이 여러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뜻있는 예인(藝人) 동참을 통해 
널리널리 확산되고 심화되어가길 바란다. 
담시(譚詩)란 무엇인가 
담시란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나아가선 극적(劇的) 요소와 서정적요소 , 서사시적 요소가 뒤섞여 있음에 그치지 않고 결정적으로는, 
그 모든 요소들을 작품의 바탕에서 떠받쳐주는 핵심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리' 이다 
(그리하여 담시는 소리꾼의 요소가 강한 광대에 의해 구연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이러한 담시가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저 '판소리' 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담시는 그러므로 김지하가 개척한 '창작 판소리' 라고도 일단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전통 판소리가 '소리' 위주로 정형화(定型化)되어 온 것에 비하면 담시는 극적인 요소와 
그밖의 많은 현대적 장르 요소들을 수용함으로서 결국 '소리' 를 중심으로 하는 
- 김지하의 표현을 약간 변용한다면 - '화엄적 장르' 가 바로 담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와 시, 극과 노래, 서정과 서사가 자유로이 혼융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담시는 탁월한 '열린 장르' 이며, 
담시는 그 본질상 창조적 시인 · 작가 · 연출가 · 배우 · 광대 · 소리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장르이기도 한 것이다. 
실로 첫 담시 "오적"이 발표된 이래 거의 4반세기가 흐른 오늘에 와서야 온전이 햇빛을 보게 되는 
이 자랑스런 민족 장르가 이땅에 깊숙이 뿌리내려 민족의 뜨거운 사랑 속에 
자라가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오적(五賊) -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짜인 첫 담시 
담시 오적(五賊)은 70년대초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을 을사보호조약때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五賊)에 비유하여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권력층의 실상을 고발,풍자하고 있다. 
제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이라 이름하는 짐승스런 몰골의 다섯 도둑들이 
서울장안 한복판 도둑 소굴에서 벌이는 부정부패의 술수경연과 호화사치, 방탕한 생활은 
시인의 통렬한 풍자를 통해 그 흉폭하고 타락한 실상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또한 부정부패를 척결한답시고 나선 포도대장(경찰 또는 사법부의 비유)은 무고한 민초(民草)
 "꾀수"만 닦달할 뿐 정작 오적의 주구(走狗)임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 맑게 개인 날 오적의 무리들이 벼락을 맞아 급살하고,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부패권력의 비극적 종언을 
무섭고도 통렬하게 예언하고 있다. 
김지하가 말하는 오적(五賊) 
'산이 있으니까 산에 간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는 등산하는 사람 나름의 말이 있다. 
물론 그 말은 핑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별의 가치는 있다. 
"산이 저기 있으니까 산에 간다."라는 말이다.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그때 그 무렵 내 심경이 이러구 저러구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만 이야기하자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겠지 그것뿐이다. 
60년대 사회지도층의 부패를 통렬한 풍자를 통해 꼬집은 '오적(五賊)' 
김지하 시인은 '오적'이 한국의 판소리와 서양의 카니발레스크 양식을 접합한 풍자시였다고 회고했다. 
김지하는 '세상이 더욱 모순투성이가 됐는데도 멋진 풍자시가 안 나오고 있다'고 지적하며, 
자신을 잇는 풍자시 작가가 나오길 희망했다.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김지하 담시 五賊(상)  
임헌영(任軒永, 문학평론가) 
1970년 3월17일, 한강 강변로에서 묘령의 한 여인이 피살 당했다. 
정인숙이라고 밝혀진 이 여인의 죽음은 한국 정치사상 매우 드문 스캔들로 5.16 군부 집권층을 괴롭혔다. 
대학가에서는 5월 축제 때 유행가 ‘눈물의 씨앗’ 가사를 바꾼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000의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것을/
죽고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승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풍자 노래가 즐겨 불렸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신민당 김상현 의원(현 국민회의)은 국회에서 
정여인이 장관급 보증의 회수여권을 소지하게 된 경위, 
그녀가 접촉했다는 26명의 고관 명단, 외화 소지 경위 등에 대한 규명을 요구했다.
(이상 김삼웅 ‘한국필화사’ 참고) 
세상은 흉흉할 때였다. 
대통령 3선 개헌안을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27분 국회사상 최단시간인 
단 6분만에 통과시킨 뒤인 데다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1970년 4월8일)까지 있었던 터라 야당으로서는 호기였다. 
이해 6월1일자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제40호는 
정당사상 처음으로 1면 전면에다 시를 한 편 실었다. 
바로 김지하의 ‘오적’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민주전선’은 2~3면에다 예의 정인숙 사건 관련 및 
‘현대판 아방궁 도둑촌’문제 등에 대한 국회발언 초록까지 게재했다. 
바로 이튿날인 6월2일 새벽 1시50분 경 관계당국은 신민당사 수색과 
기관지 10만700부를 압수당했고,‘민주전선’ 출판국장은 연행 구속되었다. 
세칭 ‘오적’사건은 이렇게 터졌다. 
이때 김지하 시인은 어디 있었을까. 
김 시인은 이미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어찌된 연고인가 하면 ‘오적’이 실렸던 ‘사상계’ 1970년 5월호는 통상 4월 중순이면 나오는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애독되어 5,000부가 매진되었고,
이 시의 통쾌함이 국회에서까지 거론되자 관계기관은 얼른 시인을 연행해 갔다. 
당국은 발행인 부완혁과 잡지를 더 이상 시판않겠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으며, 
김 시인도 일단 석방되었다. 
그의 석방을 가장 반긴 것은 ‘사상계’ 편집책임자 김승균(현 남북 민간교류 협의회 이사장)이었다. 
문제가 되면 편집 책임자가 함께 구속될 것은 뻔했기에 김승균 편집장은 얼른 김 시인을 
현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어느 여관으로 피신케 했다가 곧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김 시인의 보호자로 병원에 등록해 두고 자주 오갔던 김승균은 어느날 텅 빈 병실만 보게 되었고,
드디어 그와 발행인 부완혁도 연행,‘오적’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수사 당국은 시인과 발행인 및 편집책임자를 입건한다는 수사의 형평을 맞추고자 
당시 신민당 유진산(기관지 발행인)총재도 조사하여 ‘오적’사건은 다섯 고난자를 만들었다는 
농담도 나왔다. 
군부독재 시기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필화문학의 상징이 된 김지하 시인이 ‘오적’을 쓰게된 배경은 
그 자신의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겠지”(솔 출판사 전집 자료편)란 함축적인 
의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군부독재에 의한 개발정책은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시켜 
‘동빙고동 도둑촌’이란 술어는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 
1970년 3월 ‘사상계’ 편집책임을 맡게 된 김승균은 당시 진보적인 문인들과 밀접한 사이로 
4월호에다 ‘4.19혁명과 한국문학’이란 특집 좌담(참석자 구중서, 김윤식, 김현)을 마련하여 
리얼리즘 논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4.19직후인 재학시절에 민족통일 전국 학생연맹 
연락조직위원장직을 맡았던 운동권 출신이라 진작부터 김지하 시인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김승균 편집장은 김 시인에게 즉각 오적촌에 대한 장시를 청탁했고, 
이 천재시인은 불과 며칠만에 담시(譚詩) ‘오적’을 써왔다. 
단숨에 읽고 난 편집장은 너무 기쁜 한편 행여 잡지사 내에서 게재 반대 의견이 나올 걸 염려해 
슬그머니 부완혁 발행인 책상에다 올려두고 
“아직 못 읽어 봤는데 먼저 보시고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시침을 뗐다.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김지하 담시 五賊(중) 
편집장과 시인은 발행인 앞에서 서로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려고 좀 서투르게 만지기도 하는 등 
이 작품이 빛을 보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오적’을 읽어 내려가던 부완혁 발행인은 웃음을 억제치 못하면서 
“김선생이 알아서 처리 하시죠”라며 미뤄 결국 70년대의 문제작은 바로 5.16특집호에 
군부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여러 글들과 함께 실리게 되었고, 
그 인기만큼 빨리 법정에 서게 되었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담시는 일종의 광가(狂歌), 광언(狂言)에 속하는 것”으로,
“맹랑한 헛소리”라고 깔아뭉갰다. 
“그 담시가 우리 국가와 국민 전체를 도매금으로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북괴도당에 부종하려는 결과로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목청을 돋군 이 사설은 계속하여 “전문되는 바에 의하면 담시 작자는 북괴 도당의 대남정책인 
‘전면 부정’의 결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붓재주를 놀리는 피해망상에 젖은 
노이로제 환자였다고 한다”는, 마치 구소련의 정신병동 수감정책과 같은 논리를 폈다. 
“그 작자는 무당이 내렸거나 귀신자귀에 홀린 정신 소유자가 아니면, 
그 작품은 소위 무당들의 ‘대감놀이’ 넋두리나 미숙한 판소리 흉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문학작품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극언을 해댔다.
 이쯤 해도 좋으련만 이 글은 “병든 작자의 광언 같은 것을 인용 게재”한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대해서도 “편집 양식을 일탈한 일”이라고 펄펄 뛰었다. 
참고로 밝히노라면 ‘민주전선’은 군부독재 시절에 차마 군부의 부패상은 치고 나설 수가 없어 
‘오적’ 중 ‘장성’에 해당하는 부분만은 삭제하고 나머지만 실었다. 
언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열심히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필화 사건 때마다의 사설집만 뽑아 그 필자를 밝혀 내노라면 함부로 붓끝을 못 놀릴 것이다. 
어쨌건 ‘광언’ ‘오적’의 ‘노이로제 환자’ 시인을 가둔 당국은 
세상이 이 신문 사설처럼 취급해주기를 바랐겠지만 전혀 반대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남정현의 ‘분지’로 필화의 경험이 풍부해진 문단에서는 유파와 세대를 초월하여 
석방의 목소리가 커졌고, 시는 삽시간에 전국 단위에서 지구촌으로 번져나가 
김지하는 한국에서 가장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문인이 되어버렸다. 
조태일 시인이 주관하던 시전문지 ‘시인’을 통해 1969년 갓 시인이 된 
김지하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서울대 출신을 비롯한 극소수였으나
‘오적’사건은 그를 분단 이후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급부상하게 했다. 
더구나 막상 공판이 열리고 보니 그는 ‘노이로제 환자’도 ‘무당’도 아닌 탁월한 이론가에다 
말솜씨까지 갖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변호인이 질문만 해주면 되었다. 
그렇다고 변호인이 들러리였다는 뜻은 아닌 것이 당대의 민권 변호인이었던
 태륜기, 홍영기, 한승헌을 비롯한 여러 변호사가 법정을 뜨겁게 달궜고, 
방청석에는 함석헌, 장준하, 안병욱 제씨를 비롯한 문인, 민주인사, 운동권 출신들이 
총집결했다. 
대법정에서 열렸던 ‘오적’ 공판은 그의 익살과 달변으로 마치 만담장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나중에 ‘다리’지 필화 때 무죄를 언도하여 화제를 일으켰던 목요상 판사(현 한나라당 의원)가 
맡았던 이 재판은 나중에 네 구속자와 분리하여 김지하만 별도로 심리하게 되었는데, 
3개월 쯤 지나자 폐결핵 악화로 김시인은 병보석 되었다. 
다른 네 구속자들도 시차를 두고 하나씩 풀려나 사건이 마무리 되는가 싶었으나 
그 해 9월 26일 유서 깊던 ‘사상계’는 문공부로부터 등록 말소처분을 받았고, 
김지하 시인은 간헐적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이 재판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김시인은 5.16 이후 한국사회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보면서 
그 최고수를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란 다섯 직종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 부패의 직종을 알기 쉬운 한글로 표기한 게 아니라 
웬만큼 유식한 인사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도록 옥편을 갖다놓고 같은 음을 찾아 
이두식으로 꿰어 맞췄는데, 되도록 개견변(犬)이 들어 있는 한자를 선호했다. 
다섯 도둑들은 사람이 아니라 개같은 짐승이라는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김지하의 담시 '오적'(하) 
▲ 1970년 9월 8일, 담시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이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서울구치소에서 보석으로 출감하고 있다. 
시인의 출감 날, 신민당 당수였던 유진산씨 등이 마중을 나왔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못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나게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겄다.”는 유명한 ‘오적’의 서두는 
60년대의 좀스러웠던 시에 대한 강열한 비판 의식을 담아낸다. 
김지하는 이 시를 통하여 사회비판과 함께 현대 시문학사에서
‘담시(譚詩)’라는 형식과 전통적인 풍자기법을 재생시켜 전위화하는데 성공했다. 
담시에 대하여 그간 문단에서는 서구의 발라드와 대비하여 논의하기도 했으나 
김재홍은‘한국 근대 서사시와 역사적 대응력’에서 고전 속의 서사민요, 
서사무, 판소리와 같은 구비 서사시를 바탕한 창작 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는 담시의 구비 요건으로 서사구조를 지닐 것, 역사적 사실과 연관 혹은 대응될 것, 
사회적 기능을 지닐 것, 집단의식을 바탕할 것, 당대 현실과 암유적 관계를 지닐 것, 
율문일 것, 비교적 길 것 등을 들고 있는데,‘오적’은 바로 여기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 담시의 시대적 배경은 “단군 이래 으뜸/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세”
(식민통치를 반어적으로 칭한 채만식의 소설‘태평천하’를 연상)에,
“피로써 맹세코 도둑질을 개업한 뒤” 십년이 되는 때(바로 5.16으로부터 십년 째)의 
“양춘가절”(곧 봄)이며, 무대는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이다.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 다섯이 모여 “그간 일취월장 묘기”인
 “도둑질” 대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사건구조가 전개되는‘오적’은 마치 
고설처럼 등장인물을 하나씩 풍자적으로 소개해 나간다. 
첫째 도둑 재벌은“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천원 공사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이란 묘기를 자랑하며, 
두번째로 등장한 국회의원은 
“쪽 째진 배암샛바닥에 구호가 와르르”무너져 내리면서 “올빼미야, 쪽제비야, 사꾸라야, 
유령들아, 도둑질 성전에로 총궐기하라!”에서 처럼 말의 성찬과 부정선거를 장기로 그렸다. 
셋째의 고급공무원은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높은 놈엔 삽살개요 아랫 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먹고”하는 부정부패를 부각시켰으며, 
네 번째의 장성
(군부독재 시대에 왜 장성이 네 번째에야 등장했느냐는 질문엔 많은 견해가 있을 수 있다)은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 주고 살은 혼자 몽창 먹고” 
“부속 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까지,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하는 부정상을, 
마지막 장차관은 “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행여나 냄새날라 질근질근 
껍”씹는 묘기로 대회는 끝나는데 마지막 부록으로 이 추문을 듣고 취재차 등장했던 언론은 
“자네 핸디가 몇이더라?”란 회유에 붓이 꺾이는 것으로 상징된다. 
시는 이“절륜한 솜씨를 구경하던 귀신들이 / 깜작 놀라 어마 뜨거라”도망칠 가경으로 들어가지만 
어명으로 “나라 망신시키는 오적”을 잡아들이도록 포도대장에게 명하게 한다. 
포도대장은 오적 대신 날치기, 팸프, 껌팔이, 거지 따위를 잡기에 혈안인데 
그 와중에 “전라도 개땅쇠 꾀수”도 묶여와 “오적”으로 둔갑시키려는 고문을 가한다. 
이판사판에서 꾀수가 진짜 오적을 일러 바치자 그를 앞세우고 
오적촌 동빙고동으로 체포하러 간 포도대장은 그들에게 매수 당해 
“도둑은 도둑의 죄가 아니요, 도둑을 만든 이 사회의 죄입네다/ 여러 도둑님들께옵선 도둑이 아니라, 
이 사회에 충실한 일꾼이니 /부디 소신껏 그 길에 매진, 용진, 전진, 약진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며, 
꾀수를 무고죄로 가막소로 보내 버리고 자신은 도둑촌 지킴이가 된다. 
“어느 맑게 개인 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커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 
이때 또한 오적도 육공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인멸치 아니하고 인구에 회자하여 / 
나 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전해오것다.”라는 게 이 시의 끝구절이다. 
시는 당시 지배계층을 망라하여 오적이라 하면서도 ‘어명’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제외시켰다는 점과, 
벼락으로 급살시킨 점 등은 고전적 기법이면서도 논의해 볼만한 쟁점이기도 하다. 
판소리꾼 임진택 인터뷰 중에서 
임진택씨하면 똥바다나 오월 광주같은 파격적인 판소리가 먼저 생각나는데 
언제부터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김지하시인이 쓴 오적을 판소리로 만들고 싶은 생각을 한 것이 발단입니다. 
판소리를 처음 목격하게 된 게 대학교 5년차쯤 됐을 때였습니다. 
보자마자 아 이건 내가 해야 되는 거야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으시고 일반인들에게 공연하는 일이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 제 스승이 되는 정권진 선생께서 부채 하나를 들고 수궁가를 하시는데 
수많은 동물들의 명칭을 대면서 말과 소리로 설명하는데 부채를 피는 듯 오므리는듯하면서 
우리가 아는 동물들의 인상이 다 그려지는 겁니다. 
너무 감탄하면서 예술이론이나 연극을 모르시는 분이 
저렇게 명연기를 펼치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판소리는 세계최고의 모노드라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 저렇게 표현하는 것은 연극에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국악하는 김영동에게 연락해서 정권진 선생님을 아느냐고 하니 
마침 절친한 사이라고 해서 가서 김지하 시인이 쓴 오적의 사설본을 들고가서 
새로 쓴 판소리르 창작하고 싶어서 왔다고 첫 대면에서 얘기했습니다. 
그때 장롱위에 올려놓으셨는데 제가 소리를 배우는 5년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보통 판소리는 어릴 때부터 하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 
늦게 시작했죠. 어려운 일이죠. 늦깎기의 대표적인 명창이 김연수 명창입니다. 
또 다른 명창은 임방울 명창이 있으셨는데 이분은 독보적인 소리꾼으로 
제자를 많이 키우지 않으셨습니다. 
김연수 명창은 아마 소리로는 조금 부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대신 창극에 일가를 이루시고 제자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제가 늦게 배우면서 김연수 선생님의 일화가 저에게는 자신감을 주었지요. 
판소리를 배우고 맨 처음 발표한 작품이 오적이 아니라 소리내력이란 김지하 시인이 쓴 담시였습니다. 
정치적사건으로는 오적이 70년대의 커다란 폭발력을 가진 분화구 역할을 했습니다. 
70년대의 시작을 오적과 전태일의 분신사건이 한국사회의 70년대를 열었습니다 
두 사건이 한국사회의 70년을 열고 촉발시켰다고 얘기합니다. 
그만큼 정책사건으로서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판소리로만 보면 창하기가 어렵다. 
그 후에 김지하 시인이 쓴 소리내력이라는 담시로 창하고 연창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오적이라고 하는 시의 사설은 개념적, 공격적, 관념적 사설로 엮어놓은 것입니다. 
이런 건 이러하고 저런 건 저렇고 소리로 하면 형상이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소리내력은 등장인물이 겪게 되는 일이 순차적으로 그려집니다. 
소리로 그려나가는 길이 나옵니다. 
그 점이 굉장히 다른데 오적을 판소리로 하려면 굉장히 더 많이 외워야합니다. 
왜냐하면 소리길이라는 것은 소리를 수련하다보면 원래 길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길이 생긴다는 것이죠. 
소리의 길이라는 ㅇ소리의 선율이 원래 작곡되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소리로 길을 내어가기 때문에 길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말의 입체화가 바로 소리가 됩니다. 
작곡되어서 분절된 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입체화시켜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거든요 
소리가. 그런 점에서 오적이 어려웠습니다. 
첫째는 그래서 소리내력을 먼저 한 이유였고 그 다음에 하나는 제가 소리 내력이라고하는 담시를 
74년도에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에 갔다가 나와서 처음 불러보는데 남들 앞에서 부르는 강창을 했던 거죠. 
판소리를 제대로 알기 전에 강창을 해버렸어요. 
그랬는데 그때 한 것을 녹음한 것이 있어서 그 이후에 정식으로 학전이라는 소극장에서 
정식으로 발표를 했는데 소리배우기전에 한 것과 소리를 배워한 것하고 소리가 거의 같습니다. 
처음 할 때 그 작품에 대한 소리 길을 터득을 했던 겁니다. 
▲ 1970년 담시 '오적' 필화사건으로 서슬퍼런 법정에 선 피고인들. 
사상계 필화사건-김지하의 '오적' 
"사형 당하느니 안락死를" 中情돈 거부, 사상계 문닫아 
“그것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입을 꿰매도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은 터져 나오는 법이다.” 
1970년 당시 월간 ‘사상계’ 편집인 김승균(金承均ㆍ39년생ㆍ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씨의 말이다. 
사상계는 70년 5월호에 시인 김지하씨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게재하면서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6월 2일 당국(중앙정보부)은 ‘오적’을 게재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
(반공법 위반ㆍ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동조)로 
김지하(당시 29세)씨와 사상계 편집인 김승균씨. 
사장 부완혁(夫琓爀ㆍ당시 51세ㆍ전 율산그룹 회장ㆍ87년 사망)씨를 구속했다. 
또 이를 전재해 배포한 신민당 당보 ‘민주전선’의 편집국장 김용성(金龍星)씨를 전국에 수배했다. 
이른바 ‘사상계 필화사건’이었다. 
그동안 전국의 서점에서 시판중인 ‘사상계’를 수거해 온 당국은 이날 새벽 1시 50분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 중앙당사 1층 출판국에서 남아있던 당보와 인쇄용 옵?V판 등을 압수했다. 
김지하씨가 삽화와 함께 발표한 담시 ‘오적’은 5ㆍ16군사혁명 10주년을 맞아 
사상계가 특집을 제작하면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등 당시 사회 지도층을 
한일합방 때의 ‘을사5적’에 비유해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특히 김씨는 그 해 3월 17일의 ‘3ㆍ1고가도로 정인숙(鄭仁淑)씨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4월 8일의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게다가 ‘오적’과 그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이 결탁해 ‘오적’을 고변한 힘없는 백성을 
오히려 잡아 가두었으며, 
결국 ‘오적’과 ‘포도대장’은 대명천지에 날벼락을 맞아 죽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씨가 처음 시도한 담시는 일반 서정시보다 길고 단편보다 짧은 독특한 형태로 
판소리의 운율을 갖고 있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여매 분량으로 ‘사상계’ 18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사상계는 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 ‘사상’이 그 모태. 
통권 4호를 발행했던 ‘사상’의 편집인을 맡고 있던 장준하(張俊河ㆍ7대 국회의원ㆍ1915~1975)씨가 
53년 4월 이를 인수, ‘사상계’라는 월간종합교양지를 창간했다. 
67년 장씨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언론인 출신의 부완혁씨가 경영을 인수했다. 
사상계 폐간과 관련 김승균씨의 설명. “중정은 사상계를 없애기로 하고 
감옥에 있는 부 사장에게 사인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부 사장은 ‘장준하가 주인이니 그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며 버텼다. 
하루는 중정 과장이 장씨를 데리고 와서 부 사장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떠넘기며 결국 사인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보부가 부 사장에게 3000만원을 주고 소유권을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이 됐다.
 9월에 출소하니 사상계가 모 신문사로 팔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 신문사에 가보니 우리가 갖고 있던 철제 간판을 현관에 떡 붙여 놓았더라. 
부 사장은 ‘사형 당하는 것보다 안락사 시키는 게 낫겠다’며 3000만원을 받지 않았고, 
계속 휴간하다 자동 폐간됐다. 
나중에 부 사장이 수년간 법정 투쟁 끝에 살려냈으나 책을 내지는 못했다. 
부 사장은 율산그룹 회장을 지낼 때 그 철제 간판을 회장실에 붙여 놓았을 만큼 애착이 컸다.” 
김지하의 '오적'(五賊)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 김지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했다. 
그런데 바른 입을 가지고도 비뚤어진 소리를 해야 탈이 없던 시대를 우리는 부끄럽게 살아왔다. 
시가 있으되 권력의 가슴에 붓끝을 비수처럼 갈아 들이대지 못하던 서슬 퍼렇던 때 
시인으로 태어난지 돌도 안되는 간난애 시인 김지하가 5.16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에 
시 '오적(五賊)'을 장전해 그들의 심장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김지하는 1941년 전남 목포시 대안동에서 전기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영일(英一)이고 글을 쓰면서 지하(芝河)라는 필명을 쓰게 된다. 
목포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원주중학으로 전학하면서 성당에 나가게 되어 지학순 주교를 만난다. 
서울 중동고에 진학, 백일장에서 입상, 소월.영랑.미당의 시를 외며 시의 길로 들어선다. 
서울대 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4.19직후인 
60년 5월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대표 3인의 한명으로 뽑히기도 한다. 
5.16으로 통일촉진운동은 꺾이고 김지하는 주동자로 쫓기게 된다. 
'서울대 6.3 한.일굴욕회담 반대학생연합회'소속으로 선언문들을 발표해 
김지하는 체포.구금됐다가 넉달 만에 풀려난다. 
이런 수난 끝에 66년 8월 입학 7년반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지명수배가 되자 탄광에 들어가 일하다 폐결핵을 얻어 서대문병원에 입원한다. 
이 끝없는 저항과 도피의 시간 속에서도 그는 피를 토하듯 시를 썼고 
이 시들을 읽은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인'을 편집하던 조태일에게 넘긴다. 
조태일이 가난하게 꾸미던 월간 '시인'의 편집위원은 조태일.이탄.이근배 세 사람이었다.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은 70년 5월호를 5.16특집으로 꾸미면서 세간에 떠도는
 '오적촌'을 주제로 김지하에게 시를 청탁한다. 
오적촌은 정치를 잘해보겠다고 나선 군인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 초호화 저택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마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서민들로는 꿈도 못 꾸는 별세계인 것이다. 
김승균은 대학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함께 한 김지하의 필력을 믿었고 
김지하는 사흘 만에 3백행이 넘는 장시를 담시(譚詩)로 써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