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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특집 2] (日NHK 다큐)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에 징변된 대한제국사람들... & 학도병 그리고 詩 (43:29)

무정애환 2011. 8. 11. 12:56

 

 



학도병

1930년대 이후 日帝는 조선의 영구적인 식민지화를 위해

전반적인 식민통치의 안정화라는 기본전략 속에서 각종 학교의 증설, 교화단체의 설치 등을 추진하였다.

또한 '지방자치제'나 '의무교육제',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부여'와 같은 사안들을 검토하기도 했고,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것들을 관철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출전하는 학도병



이는 1910·1920년대를 통해 정치·경제적 수탈 및 통치구조가

어느 정도 체계화되었다고 판단했던 일제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자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즉, 조선인과 조선문화를 자본주의적 인간형과 그 문화로 어느 정도 성숙시켜서

식민지화를 문화적·사상적으로 완성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성은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장기적이고 단계적인 과제였다.



그런데 만주사변과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전쟁의 확대 과정 속에서 점차 군부, 특히 육군내 강경파가 모든 실권을 차지하게 되고 제반 사회구조 또한 전시파쇼체제를 강화시켜 가야 할 필요성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정책도 애초의 방향대로 단계적으로 추진될 수만은 없는 조건이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敗戰의 가능성이 높아져가자, 그들의 원래 계획대로 조선인이 '皇國臣民化'되기도 전에 오히려 모든 계획들을 앞당겨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통해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예를 들어 앞에서 보았던 의무교육제와 징병제 및 靑年鍊成制度의 관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1943년 12월 26일에 京城帝大 강당에서 열린 학도지원병 강연회에서 총독부 학무과장 大野謙一은 "戰時下의 교육은 간소·실용·단련주의여야 한다"라고 하면서, 원래 계획과 달리 의무교육제가 실시되기 전인 1943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에 대해, 그 대신 청년훈련 및 청년특별연성제도 등을 강화했다고 변명하였다.

결국 이러한 정책은 애초에 목적한 식민지 안정화 전략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民心의 이반"과 각종 불만의 고조, 소극적인 저항의 만연이라는 사태를 낳게 되었다. 이는 곧 그들이 주장하던 '內鮮一體'의 이념적 기반이 조선에서는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근본적으로 와해되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진정한 의미의 내선일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대륙병참기지의 정신적인 기반 조성이 내선일체로 표현"되어 일본인과 똑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신념으로 조선인을 전쟁에 참가시키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內鮮一體'에 대한 각종 반박 논리가 횡행하게 되었으며 그 논리에 기반한 여러 형태의 저항운동, 즉 민족운동이 점차 활발해져 갔던 것이다.

일제측의 '內鮮一體論'에 대해 가장 빨리 적응해 갔던 것도 倂合 이후에 태어난 학생층이었지만, 그 논리적 허구성에 대해 가장 높이 반박하고 대응했던 계층도 바로 학생층이었다. 학생층의 사상동향은 일제측의 표현대로 "가장 민감하게 世間의 입장을 반영하고 사상운동의 첨병"에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이들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층이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자들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학생은 감수성과 뇌동성이 풍부하고 특히 중등학생들에게서 그 깊음을 볼 수 있는데, ... 일단 민족적 반감을 야기할 경우 그 움직임은 상식을 벗어나는 태도로 나아"간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학생을 비롯한 청소년층의 "민족의식에 기초한 皇民自覺의 결여는 나아가 자유주의·개인주의적 관념에서 나온 小乘的인 內鮮대립사상"으로서, 특히 "최근의 南方 戰局"이 "사상이 미숙한 청소년 학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비록 일부 학생에 국한되었다 할 지라도 학생층의 동향 여부는 對社會的 파급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어쨌든 이전 시기보다 보통학교를 비롯한 각종 초등학교에의 입학율이 급격히 높아짐으로써, 학생층의 사회적·계급적 기반이 더욱 확대되었던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교사 채용시에는 "두뇌가 우수한 자보다도 內鮮一體 이념에 투철한 인물을 선발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학교당국의 강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절대적인 학교수의 증대, 戰時 人力의 부족 등으로 인해 조선인 교사들도 상당수 채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 중에는 민족주의적 의식을 지닌 자들도 많았다. 당시 학생민족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 민족적 의식을 지닌 교사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이로 인해 당시 일제 검찰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학교 교직원 및 학생의 사상정화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헌시

-반도학도특별지원병 제군에게 

 *달성정웅(서정주의 개명 창씨)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유유히 흐르는 우리의 시간이 
이제는 성낸 말발굽 뛰듯 하다 
벗아 하늘도 찢어진 지 오래여라 
날과 달이 가는 길도 비뚜른지 오래여라 
거친 해일이 우리와 원수의 키를 넘어선지 
우리의 뼈와 살을 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래여라 
지극히 고운 것이, 벗아 
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든 꽃자줏빛 바다  위에 
일어나려 아른아른 발버둥을 치는도다. 
우리 혼령으로 구단(九段) 위에 짙푸를 
사랑에, 사랑애 목말라 있도다 
정면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느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에 가시를 세워 
사랑보단 먼저 오는 원수를 맞이하자 
주사위는 이미 던지어졌다 
다시 더 생각할 건 절대로 없었다 
너를 쏘자, 너를 쏘자 벗아 
조상의 넋이 담긴 하늘가에 
붉게 물든 너를 쏘자 벗아! 
우리들의 마지막이요 처음인 너 
그러나 기어코 발사해야 할 백금탄환인 너!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 
벗아, 그리운 벗아, 
성장(星章)의 군모 아래 새로 불을 켠 
눈을 보자 눈을 보자 벗아...... 
오백 년 아닌 천 년 만에 
새로 불을 켠 네 눈을 보자 멋아...... 
아무 뉘우침도 없이 스러짐 속에 스러져 가는 
네 위엔 한 송이의 꽃이 피리라 
흘린 네 피위에 외우지는 소리 있어 
우리 늘 항상 그 뒤를 따르리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6일 

모윤숙의 어린날개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
-학도병 말그대루 학생이 전쟁에 참가하는 군인?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날개를 편다는  것은
전쟁에 참가흐므로 네 꿈을 펼치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로 해석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
-그리고 그 결과가 아주 긍정적이다... 희망적이다 이런 뜻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 
-혼이 탄다 이거 죽음도 불사한다는 뜻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
-태양은 일본 제국주의 깃발의 상징이져 태양=일본으로 해석
승리하는 일본이 너를 맞는다 이런 뜻이구 고운 피 고운 뼈 이것도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한거져 죽는것이 영광된 죽음이라는 문맥으로 해석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나라의 언약 제국주의를 상징합니다  전체주의...
일본의 승리가 아름답다... 전쟁 자체를 찬양했군요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 
-침략자가 침략 당한 쪽을 적으로 규정하다니 우습져?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 
-이부분 카미카제 특공대 (자살 특공대)
카미카제를 찬양하고 독려했다고 볼수 있네요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결국 니가 날아가서 전쟁하고 그러면 세상이 행복하다 모두 웃는다
전체적으로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고 찬양하고 전쟁 자체를 찬양했다.
 
1945년 섬나라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자마자 덴노 헤이카에서 
눈물을 싹~ 딱고 웰컴 조지워싱턴을 외친 지독한 변신의 귀재 
김활란이라는 女(계집 여字)子는 나중에 따로 실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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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者와 女들과는 달리 민족정기를 불사르며
일제의 침탈에 항거를 했던 독립군... 아, 독립군...
 
‘봉오동·청산리 대첩’ 관련 희귀사진 발굴

간도사료 전문가 김재홍씨, 일본 보병 75연대 사진첩 공개
독립군 살상장면 찍어 ‘전리품’처럼 일본군 제대 기념으로-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100돌인 29일을 앞두고, 항일무쟁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였던 ‘봉오동·청산리 대첩’과 관련된 희귀 사진 수십장이 발굴됐다.

 

 

간도 사료 전문가인 김재홍씨는 27일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당시 독립군에게 섬멸당한

일본군의 주력부대였던 함경도 나남19사단 예하 보병 75연대의 사진첩을 <한겨레>에 공개했다.

 

김씨는 “이 사진첩은 1920년대 보병 75연대에서 복무하던 한 일본군의 제대를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1990년대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재미동포 언론인 맹우열씨가 그 일본인 후손에게 구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진첩에 실려 있는 한 독립군의 처형 장면 사진에는

‘대정 10년(1921) 7월13일 오전 9시’라는 날짜와 ‘하얼빈’이라는 지명 등이 뚜렷하게 적혀 있고,

‘마적’이란 이름으로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 살상당한 독립군과 한인 양민들의 떼주검 장면이 전리품처럼 소개돼 있다.

 

 

함경북도 회령에 주둔한 보병 75연대는 1920년 6월 봉오동에 이어

10월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에게 연패한 뒤

명동촌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 한인 수만명을 수개월에 걸쳐 보복살상한 ‘경신참변’을 주도한 부대다.

 


사진첩에는 또 봉오동 전투 직전에

두만경변 삼둔자 싸움에서 독립군에게 대패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실제 모습이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군 남양수비대의 사진도 실려 있다.

 

이밖에 일본군의 전투 훈련 장면,

회령 시내에서 일본군들이 민속놀이를 즐기는

모습 등 당시 일본군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료들도 들어 있다.

 

 

사진첩을 감수한

독립운동사연구소 이동언 박사는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1920년대 항일투쟁 사료가

대부분 광복 이후 채록한 우리 독립군과

그 후손들의 증언에 바탕한 연구서 위주였다면,

이 사진첩은 적군인 일본군이

당시에 남긴

실증적인 기록이란 점에서

사료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김경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