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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 쓸슬하다

무정애환 2013. 12. 17. 20:43


 
 

 

 




남자들, 쓸쓸하다

그가 바로 지금 당신 곁에 있다.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를 보지 말라.

그는 한때 가부장제의 시종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그는 한때 권력자처럼 군 과오가 있었지만

그 또한 즐거워서만 그 권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다.

그는 꼼꼼히 따져보면,

사실은 한 번도 배불리 먹어본 적 없었고

한 번도 그 권력에 취해본 적 없었고

또 한 번도 그 각질의 얼굴 뒤에 억눌려 있는 자기 감흥에 따라 마음 놓고 소리쳐 운 적도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빈곤하게 자랐으며 먹고 살 만하게 됐을 땐 당신들의 왕성한 욕망으로부터 짐짓 비켜나 서있어야 했다.

그는 권력자로 길러졌지만 막상 어른이 됐을 땐

이미 권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고,

그가 소리쳐 울어도 좋다고 생각할 땐 아무도,

심지어 가족조차도 그를 돌아다보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불안한 '틈'을 살아온 세대이다.

그에게 뭘 더 바라는가.

많은 '아버지'들이 지금 혼자 있다.


 

남자는 권력인가

 

가부장제가 부여했던 남자의 절대적 권리는 이미 법률적으로,

제도적으로 대부분 해체되었는데

'아이를 만들어 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남자들의 '책임과 의무'는 조금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권력자로 길러진 나이든 남자들의 신세는

그의 내부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 때문에 더욱 더 비극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만들어진 권력자'로서의

원초적 관성 때문에 더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나이가 들어도 '책임과 의무'의 사회적 억압은 절대적이므로

오늘도 '무서운 자식'들과 '똑똑한 아내'와 자본주의 경쟁이 주는 '잔인한 세계 구조'에 가위 눌리면서, 저기, 어둑한 베란다나

냄새나는 쓸쓸한 뒷골목에 피신해 담배 한 대,

소주 한 잔으로 남몰래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중이다.


남자가 이상(理想)을 잃으면

여자의 헌신은 산지사방 회자된다.

남자는 가해자로서 설자리가 없다. 남자다운 남자가 없다는

한탄의 말이 도처에서 들린다. 남자가 이상을 잃으면

억만금을 벌어 와도 남자다울 수 없다.

남자는 절대로 혼자 남자다운 남자가 될 수 없다.

남자는 그렇게 태어난다.

이 땅의 남자들을 남자다운 남자로 키우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돌아누운 모든 남자는 쓸쓸하다

많은 남자들이 이미 너무도 쓸쓸하다.
괜히 남자인 척 사소한 일에 똥 뀌고 성낸 남자가 구부리고 누워 잠든 그 등을 한번 오래오래 내려다 보라.

씩씩하게 내 몸 속에 들어왔다가 어느덧 곯아 떨어진

남자의 눈 밑 잔주름이나 앙다문 입술이나 어느덧 군살이 오른

아랫배를 눈물겹게 바라보라.

침대에 들어와 있을망정 그는 잠든 다음에도 모든 남자의 발기를 훼방 놓고 있는 잔인하고 리얼한 세계의 구조와 만나고 있다.

남자를 향해 절대 '우리집 기둥이다'라고도 말하지 말라.
전투복을 벗고 누운 모든

남자는 쓸쓸하다. 애틋하지 않은가.


남자의 우울한 생리

남자를 우울하게 하는 또 하나의 생리학적 보고가 있다.
남성의 상징인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35세 전후부터 매년 1%씩 감소한다는 그것이다.
그런데 그 기점으로 여성들은 여성호르몬이 감소하는 대신에

남성호르몬이 조금씩 증가하여 60대 정도가 되면

여성의 남성호르몬의 비율이 남자들을 압도한다는 이야기인데 전철이나 공중장소에서 목소리크고 활달하게 웃는 사람들은

여성 노인이고 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있는 사람은

남성 노인이다.

그들은 이미 우울증, 기억력 감퇴, 판단력 미비,

발기부전 등의 갱년기 증상을 보이고 있다.

이 시대의 남자들은 결국 그 잘난 폼만 잡다 가는 것이다.

여자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으면 기다림이 있는 것이고

남자가 혼자 있으면 절망감이 있다.

남자는 결국 어린아이가 되어 부드러운 손길을 기다리지만

한층 성장한, 자신감있는 여자들은 그 절망감있는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시대의 남자는 그렇게 쓸쓸히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등 뒤에 그가 있다

많은 '아버지'들이 지금 혼자 있다.
죽음으로 밀려 나가는 실존의 길은 캄캄절벽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지만 그들의 내면엔

이미 실존의 공포가 깃들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아내들 조차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를

일방적으로 몰아 세우고 젊은 자식들은 더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라고 다그치다가 희망 없으면 일제히 속으로 고개를 돌린다.

은퇴한 아버지들은 아무 데도 갈 데가 없고

그래서 빈집을 지키며 서성거릴 뿐이다.

이미 그는 예전의 그 아버지가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거든 말이 통할 수 있는 길을
 

이제 당신이 찾아야 할 때이다. 아니 말이 안 통하면 눈을 보라. 그곳에 당신이 가닿을 당신의 앞날이 있다.

그가 쓸쓸하면 확언하거니와 당신의 앞날도 머지않아

그처럼 쓸쓸할 것이다.

그러니 눈높이를 그에게 맞추고

가만히 아버지...라고 불러보라.

 

- 박범신 산문집『남자들, 쓸쓸하다(푸른숲, 2005)』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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