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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아온 길

무정애환 2012. 6. 21. 20:33

※ 80평생 살아온 길을  죽기 전에 서툰 솜씨나마 적어보았습니다.

오타가 있을겁니다.(늙은 손으로 타자를 치니 까)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의 길, 나의 인생

- 나의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차 윤 명

목 차

 

1부. 나의 걸어온 길

1장. 나의 어린 시절 (1929 ~ 1943)

2장. 나의 청년기 : 중학교, 부산 사범학교 (1943 ~ 1953)

3장. 결혼 초기 : 교직 부임, 결혼, 자녀 출생 (1954 ~ 1968)

-울산군 온양면, 대연동, 영도 시절

- 4형제 출생

4장. 자녀 성장기 : 자녀가 성장하고 막내가 서울로 떠나기 까지

(1969 ~1987)

- 양정, 광안리 시절

5장. 다시 둘만의 가정으로 : 정년 이전까지 (1988 ~ 1995. 2)

- 광안리 시절

6장. 인생은 정년 이후부터 : 또 다른 시작 (1995. 3 ~ 현재)

- 자원봉사, 어머님이 아프심

- 칠순, 금혼식, 어머님 글모음 출판

- 교회 출석, 세례 받으심

 

 

2부. 관련 신문 기사, 방송, 글 모음

(아래의 관련 기사, 방송 등을 모아서 편집)

- 1988. 8 - 1988. 9 : KBS FM1 ‘Good morning pops’(06;00~07:00) 영어 회화 방송의 ‘이럴땐 영어로?’ 란 코너에 부부가 함께 출연.

- 1989. 7 .1 부산 MBC TV 방영 부부영상편지 당선작 : 나의 영원한 동반자며, 길벗인 당신에게

- 2002. 7 - 2002. 9 : 매일 수차례씩 PSB TV의 향토사랑 캠페인(아시안 게임) 방송에 출연.

- 2002. 10. 14 : KBS 1 TV 아시안게임 1주년 기념 방송에 출연

- 2003. 6. 30 : 국제신문 27면 기사, 한글 전수 바쁜 ‘국제서당’ 훈장 차윤명씨

- 2003. 12. 4 : KBS 1 TV ‘생생 투데이’(오후 5:45~ 6:00)에서 자원봉사 활동사항이 방영됨

- 부산 KBS ,MBC, PSB, 교통방송, 평화의 소리방송등 라디오 방송에 자원봉사 관계로 여러차례 인터뷰를 했음.

 

 

3부. 영롱한 빛을 보며 아름답게 살련다. (어머님 글 모음)

1장. 영롱한 빛을 보며 (시 모음)

2장. 인 생 (시 모음)

3장. 나의 영원한 동반자며, 길벗인 당신에게 (글 모음)

 

저 자 약 력

 

1929. 11. 15 저자 출생 (부산 동래)

1944. 3 동래중학교 입학

1945.10부산중학교로 전학 (2학년 말)

1950. 4 부산고등학교 졸업 (3회)

1953. 4 부산사밥학교 연수과 입학

1954. 4 부산사법학교 연수과 수료

1954. 4 교직 부임(울산군 온양국민학교)

1954. 12. 24 부인과 결혼, 온양면 남창리에서 첫살림

1956-1968 슬하에 4남(동수, 동욱, 동혁, 동하)출생

1989, 7. 1 저자의 회갑을 축하하는 ‘부부 영상

편지’가 당선(부산 MBC TV 방영)

1995. 2. 28 교직생활 정년 퇴임

1997 - 2006‘한글서당’을 비롯한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

2005. 1. 8 결혼 50주년 금혼식 및 황정순 여사 글모음 출판 기념식

2010. 8.25세례 받음

2012. 1. 8부인 황정순 여사 소천(81세)

현재 슬하에 자식 넷, 며느리 넷, 손자, 손녀 여덟을 둠.

 

 

 

 

 

 

1부. 나의 걸어온 길

 

1장. 나의 어린 시절 (1929 ~ 1943)

 

2장. 나의 청년기 : 중학교, 부산 사범학교 (1943 ~ 1954)

 

3장. 결혼 초기 : 교직 부임, 결혼, 자녀 출생 (1954 ~ 1968)

4장. 자녀 성장기 : 자녀가 성장하고 막내가 서울로 떠나기 까지

(1969 ~1987)

 

5장. 다시 둘만의 가정으로 : 정년 이전까지 (1988 ~ 1995. 2)

 

6장. 인생은 정년 이후부터 : 또 다른 시작 (1995. 3 ~ 현재)

 

1장. 나의 어린 시절 (1929 ~ 1943)

 

[아버님에 대한 기억]

-한 사람이 들어서 온 가족을, 모든 친척들을 살도록 해주신 분

 

한마디로 자수성가(自手成家) 하신 분이다. 아버님은 동래 시장 제일 요지 사거리에 큰점포(金剛商會) 를 가지고 계셨어, 그러니까 한 집안에 한 사람이 잘되니까 그 밑으로 해서 여러 친척들이 살기가 좋아 차츰 좋아졌지. 살기 어려운 친척분들에게는 이문을 남기지 않고 (원가에) 물건을 주셨거든, 그러면 친척들이 그 물건을 가지고 동래 부근의 장에 가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는 잘들 그냥 해나갔고...

그러니까 집안 사촌 육촌들 다 모두 살도록 해준 셈이지.

 

아버님 형제 분은 세 분이신데 우리 아버님이 제일 막내라. 막내가 형제들 중에서 제일 성공한 셈이지. 성공하니까 형님 집도 많이 도와주고, 그 자식들도 사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한 사람이 들어서 온 가족을, 모든 친척들을 살도록 해준 셈이지.

 

우리 아버님이는 젊을때 동래에 오셨고, 그 외에는 모두 시골에 살고 계셨다. 경남 함안, 산청 쪽에 차씨 집성촌이 있는데 우리 아버지도 거기 계시다가 동래로 오셨다고 들었다.

 

영도에도 아버님 사촌한 분이 살고 계셨다.

아버님 살아계실 때, 그 때만 해도 한사람이 중심이 되니까 자연히 모두들 모이는 기회가 많았다. 그당시엔 명절때면 한 집안 가족이 거의 다 모여셨다.

한사람이 가시고 나니까 자연히 잘 안 모여지던군.

 

그당시는 어려운 시절 아이였나 굶는사람이나 걸인들이 매우 많았어. 동래(東萊)의 장날 (5일자)에는 걸인들을 위해 대문 앞에다 큰 다라이 같은 그릇에 보리밥을 가득 담아 놓으면 와서 자기네의 깡통에 담아가게도 했었단다.

 

 

[나의 태어남]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부모님 늦은 나이에(그 당시엔) 아들을 봤으니 경사가 아니였겠는가.

위로 형님 한분 누님 두분이 계셨는데 바라던 아들 (그것도 노산)이었으니 경사였었겠지. 첫쩨와 둘쩨 누님사이에 누니 한분이 더 계셨다는데 어릴때 병사(病死)-

 

그런데 내가 3살때쯤에 큰병에이 들어 백방으로 다녔으나 효과없이 죽은애니까 하고 방의 한쪽 구석에 눕혀두었는데 동래에서 항의원을 하고 계시던 고모부님께서 보시고는 기왕에 죽은 애니까 마지막으로 한기지 처방을 써보자 하고 먹은 약이 효과가 있어 차츰 좋아졌다고.

나중에 듣고보니 이열치열이라고 열병인 환자에게 열로 다스렸다고 하시더라.

 

 

 

[아버님과 제사]

-“제사를 이렇게 밤중에 지낼 필요가 뭐 있노?”

 

옛날엔 모두 제사는 한밤중에 지냈는데 우리집도 그랬거든. 그러니까 잠이들면 제사 참여 못 하고 제사 음식 얻어 먹기가 힘들었지. 그래서 형수보고 “형수요, 제사 모시거든 날 좀 깨워주이소.” 몇 번 다짐을 해가지고 참여를 하곤 했다.

 

그 때 제사때면 동래에 있는 친척들이 다 모이면 거의 30~40명 정도 되었지, 어른들은 1층에 계시고 아이들, 4촌, 6촌들은 2층에 올라가서 마음대로 뛰놀았지.그게 남의 집이 아니니까 누가 말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모셔오다가 아버지께서 어느날은 “제사를 이렇게 밤중에 지낼 필요가 뭐 있노?” 그래서 저녁먹고 1, 2시간 있다가 저녁에 모시면, 모시고난후 서로 집에 돌아가기도 쉽고, 그래서 제사를 그렇게 모셨는데, 아마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그럴까, 굉장히 개명된 생각이었어... 하필 구태의연하게 한밤중에 지낼 것이 뭐 있노. 그래서 그때부터 저녁먹고 1, 2시간 있다가 제사를 지내왔다.

 

 

[아버님의 사업]

-포목점, 인삼, 설탕, 운동화“참 귀했지. 그때는 돈 주고도 못 사는기라”-

인자하셨고 어려운 친척분들 뿐아니라 가난한 이웃들 잘 돌보시고 좋은 치구부들 많두셨고 - - -.

처음부터 포목점을 했었다고 한다. 옛날엔 포목점하면 딸린게 또 있었거던, 인삼, 그리고 그 당시 굉장히 귀했던 운동화. 그 당시에 왠만한 사람들은 운동화를 못 신는단 말이야. 운동화를 한번도 못신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장사를 크게 하니까 거기에 딸린게 또 설탕. 그당시 설탕은 정말 귀했거든... 설탕, 인삼, 이래 다 같이 장사를 하셨어.

 

포목상을 하시면서 인삼, 설탕을 같이 하셨는데 그때는 딴 점포에는 그런거를 파는데가 거의 없었다. 인삼이니 사탕이니. 참 귀했지. 그때는 돈 주고도 못 사는. 소위 말하는 배급제인데, 배급이라고 해보았자 많이 주나.

 

설탕은 우리가 20~ 30대 까지만 해도 명절때에는 설탕 한포대 갖다 주는게 제일 큰 선물이거든, 그때는 참 귀했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돌아가셨다.

 

 

[형님에 대한 생각]

 

우리 형님, 형님은 그래도 돈 많은 집에 태어나가지고 세상 물정 잘 몰라셨겠지.

미남에다 성격이 좋아셔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 인기였다고. 그리고 의리가 있었어 학생데모 같은 것도 주도자로 활약 하셨겠지.

결국은 데모 주동자로 고등보동학교(지금의 고등학교)4학년때 퇴학당하셨다고 들었다.

 

 

[참고자료] 동래고보 동맹휴학(1929) : 형님의 퇴학

(출처) 독립운동사 제9권 : 학생독립운동사, 1977.

저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발행자: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제2절 경남지방의 학생민족운동

1. 동래(東來)고등보통학교

1929년대 년말부터의 전국적 학생항쟁에 즈음하여 동래고보에서도 12월 20일, 2, 3학년이 일제히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는데, 동월 21일에는 1, 4학년도 ① 광주학생의 무조건 석방, ② 가해자를 엄벌로 처치하라 등의 요구 조건을 내어 걸고 맹휴에 들어갔다.20)

이런 사태에 대하여 경찰은 주모 학생을 찾는 수색을 전개한 끝에 김유태(金有泰)·문재순(文載淳)·추학(秋鶴) (이상 3학년), 차일명(車日明)·김찬규(金瓚圭)·이상태(李相泰)·양승호(梁承浩) 등을 구속 또는 호출하여 오랫동안 엄중 취조한 바있다.21) 그런데 1월 10일 동래고보 1, 2, 3, 4학년 학생 전원은 다시 ① 경찰권 교내 침입 반대, ② 퇴학생의 무조건 복교 등을 요구하면서 퇴교, 맹휴에 들어갔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동래고보의 토정(土井) 교장은 맹휴 학생 모두를 정학 처분하였다.22)

1월 18일 차일명 등 세 학생을 퇴학시키고, 경찰이 이들을 구속하자 동일 다시 맹휴에 들어갔다.23) 1월 20일 1,2,3,4학년 전원이 다시 맹휴를 단행하고자 강권일(姜權一)이 진정서를 몸에 숨겨 입실하려 했으나 동교 산본(山本) 교사와 경찰이 강제로 몸을 수색하여 맹휴 계획이 발각되어 서홍렬(徐洪烈)·서상희(徐相喜)·이상묵(李相默)·양승호·김옥출(金玉出) 등이 퇴거 명령을 받고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리고 이 맹휴의 주동 학생으로 지목되어 백남석·김태수·정근모(鄭根模)·황선상(黃善相)·옥영진(玉瑛振) 등이 정학 처분되었다.24) 이 같은 사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동래서는 동래고보의 항일맹휴와 관련하여 동래 소년 동맹 김영배(金永培[위원장])·조경렬(趙敬烈)·박진규(朴鎭奎)·임무실(林武實)·김동득(金東得)(청맹 기장지부 위원장) 등을 구속하였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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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29년 12월 28일, ≪조선일보 호외≫.

 

21) 1930년 1월 1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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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930년 1월 15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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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930년 1월 20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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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30년 1월 24일,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25) 1930년 2월 14일, ≪동아일보≫.

 

 

 

[참고자료] 동래고보 동맹휴학(1929) : 큰아버님의 퇴학

(출처) (다음카페 중에서) 노덕술과 경찰청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의

 

노덕술(盧德述, 일본식 이름: 松浦鴻, 1899년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였다. 일제강점기때 고등계형사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하며, 해방이후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에 반민특위로 체포된바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창씨개명은 마쓰우라 히로 (일본어: 松浦 鴻).

.... [중간 생략] ....

노덕술은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2장. 나의 청년기 : 중학교, 부산 사범학교 (1943 ~ 1953)

 

 

[동래중학교 입학이 거부됨]

-“너의 형 차일명이제?””“ 됏다, 가라”

 

내가 그후 동래중학교에 시험치러 갔었지.

시험을 다 치고 맨 끝에 왜 요새로치면 면접, 그때는 구두시험이라고 했는데,,

구두시험장에 들어가니까 교장선생님이 묻는게,

“너의 형 차일명이지?”라고 묻지않나.(일본말로)

 

학교 족보에 있는 모양더이라고.(요 주의 인물)

“하이”(예) 하니까

“ 됐다, 가라” 하는게 아닌가.

 

그이상 두마디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집안이니까 그집안 내리기는 이 학교엔 올 수 없다는것이겠지.

 

그 당시엔 거기 못가니까, 공업학교와 직업학교가 있었고, 또 동래원예중학교라고, 원예학교가 처음 생겼다. 그런데 그런 학교에는 가가가 싫었다.

 

내가 중학교 입학 사진보면 형님이 거기 게시거든. 내 보호자격이 되어 있었다. 그때 60하면 굉장히,,, 요새 80, 90되는 사람하고 똑 같이 취급했거든..

내가 맨 끝이니까, 내 학교 졸업당시에 아버님이 거의 60이나 되었을끼다. 그러니까 보호자는 형님이셨다.

 

내가 자랄때 그당시 부모님이 좀 잘못한것이라고 지금도생각한다. 막내라고, 귀한 막내니까 그냥 그냥 키운것이었다. 마치 온실의 화초마냥.

학교다닐때도 조금만 아프면 집에서 사람이 업고가서 앉차주고,.

소풍도 안보내고, 혹시나 다칠까서해서 운동회도 그랫고 나는 그 당시에(6학년때) 수학여행도 못 갔었다. 그때는 수학여행을 일본 규슈로 갔는데.

 

그당시에, 요새같으면 대학 못 들어가는 학생들 재수하는 학교가,,, 중학교 못들어가는 아이들 재수하는 학교가 있었는데, 강습소라고 했는데...

그 강습소 소장이 우리 아버님이셨거든..

아버님께서 강습소를 하나 지어서 성적이 나빠서 중학교 못가는 아이들을 1년 공부시켜가지고 다음에 시험쳐 보내고... 나도 거기에 들어갔었다.

거기 들어가서 1년 마치고 그 다음해에 또 시험치러 갔었다.

그때 동래중학교 선생님은 한사람 빼고는 모두 일본 사람이였어. 일본에서도 아주 못된 선생님들, 독질만 보냈는데, 그 이유가 아이들이 너무 반일 사상이 심하니까.

 

 

[다시 동래중학교에 입학함]

- 형님 친구분의 도움으로..”***********

 

그 다음 해에도 시험을 쳤는데 그때는 뭘 믿고 했는가 하면,,,

큰아버지하고 동래에 친구 중에 한사람이 학교에 선생님으로 와있어서, 그 사람이 자기 마누라는 약국하고 자기는 선생하고, 그러니까 동래에서 제법 유지였지.

 

그 사람을 사이에 넣어가지고, 다시는 데모 같은것 안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그 선생님이 보증하기로하고.

그래서 입학이 허가 되었다.

 

 

 

[수영비행장 건설에 동원됨]

-“수업은 1/3도 못했고 2/3쯤은 나가서 일하고...,”

 

중학교 1학년, 2학년때는 수업을 거의 안했다. 매일 나가서 일하고...

그당시 우리가 동래에 있으니까 수영비행장 건설할때는 전부 학생들을 동원시켜가지고 산에서 돌, 주워다가 나르고..

 

수영비행장은 그때 만들었는데 모듣 중학생을 동원시켜서 했지. 수업은 1/3도 못했고 2/3쯤은 나가서 일하고...

학교서 같이 출발해서 그리로 갔지. 수영까지는 한 쯤 걸렸다.

 

그당시 학교마다 일본 군인이 한사람씩 있었는데, (배속장교)동래중학교에도 한사람이 와 있었다. 이사람이 아주 못됬는데 우리 담임이 되었다. 군인 소위인데.

수영비행장가서 일을 하는데 내처럼 작은 아이들은 참 힘들었다... 그래도 나가서 일을 해야되는데 어느날은 너무 몸이 아파서 가기가 힘들어서 할 수 없이 그날 하루 쉬었나. 그 다음날 학교에 갈 때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하나 써 가지고 갔었는데 담임이 야단을 치더라고, 고함을 지르며 괭장랬었지.

 

그때는 또 군인들 말 먹이 한다고, 풀, 왜 여름에 풀이 많지않나.

또 겨울되면 소나무에서, 나오는 솔갱이 잘르기 그것가지고 뭐를 만드는지.. 연료를 했는가.. 겨울되면 그것을 잘랐지. 참 그때 애들 죽을 고생했다.

 

 

[중1때 좋은 친구 만났다]

중학 1학년때 집 근처에 사는 추영식란 친구집에 놀러가서 이 친구가 변압기를 만들고 전동기를, 그리고 광석 수신기 같은것을 만들고 있지않나. 신기 하기도하고해서 견딜 수가 있나. 매일같이 가서는 보고, 배우고 제미있고 신기하더라.

구후 계속 한것이 내 취미가 되어벼려 지금까지도 그렇지.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아버님이 그런쪽의 회사에 계셧다고 들었다.

그 친구는 대학나와서 한국전력에 입사 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 형님께서 사업을 맡으셨으나.,,

-“중학교때 당구를 배웠다..”

 

아버님 사망후에는 형님이 가업을 맡어셨지.

해방되고 나니까 세상이 매우 복잡 해 졌는데, 사기하고 협잡하고 하는 그런 놈들이 잘 살지, 올바른 마음가진 사람은 장사가 안돼,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장사를 해보고 안되니까는 점포를 세를 주었어...

세들어 온 사람이 베 장사를 안하고 거기다 당구장을 차렸어.

그때 당구가 유행 할때니까... 그때 당구장을 하는 바람에 나도 사람들이 안볼 때 가서 한번씩 치거든, 그때 그게 어찌 그리 재미있나.

 

건물이 큰데,,, 앞쪽 큰 도로변에는 점포고, 안쪽에는 살림집이고...

어른들 안계시면 당구를 배웠는데 처음 배울 때 그렇게 재미있데...

그때 중학교 친구 하나하고, 우리집 바로 근처에 있었거든,,

그 친구하고 참 사이가 좋았지. 그 친구하고 어른들 안계시면 치고했는데, 한 번은 걸려가지고 혼났지.

 

형님한테,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당구 친다고 혼났지.

내가 세 살때 장가갔다고 하니까 거의 15~6년 차이가 났다.

근데 또 그당시에 당구장이 장사가 안될 이유가, 당구를 치는 사람들이 전부 놈팽이들이 오거든 지금같이 회사원들이 오는게 아니고 집에서 놀면서 애먹이는 놈들이 당구를 쳤어. 그러니 돈을 주나. 반 외상으로 달아놓고 치고...

그러고 주먹을 쓰는 놈들이 되니까 독촉도 잘 못하고..

 

 

 

[초량으로 이사]

- 부산중학교로 전학

 

당구장을 하다가 도저히 안되가지고 그집을 처분했다,

팔고 초량으로 갔다. 그게 내가 중학교 2학년 말 쯤 되었나.

이사를 갔는데, 요새는 고관이라고 하나, 거기로 이사를 했다.

 

형님께서는 해본 것도 별로 없고, 그 당시는 양심 가지고는 별로 할 것도 없고,,

그당시 (이사간 집) 그 건물이 여관을 하던 건물인데 2층은 방이고,,,

아래층 방을 다 띁어가지고 거기다 점포를 차렸네...

 

그당시에 문방구를 했어. 그위치에 문방구 점을 차려 놓으니까 장사가 되나, 형님이 붙어가지고 할 사람도 아니고, 큰엄마한데 점방을 맡겨놓고 그러니까 장사가 되나, 그게 안되지.

 

그래서 그집을 또 처분을 해가지고 초량에 옛날 철도 관사있는 부근에 집을 하나 사가지고 갔었다.

그때 할머니 하고 내혼자 작은 방 하나 쓰고, 어머님과 조카들 한 개 형님 내외 방 하나.

집을 시내로 이사오고 난 다음에 그때는 통학하기가 힘들었거든, 교통도 안좋고..

그래서 부산중학교로 전학을, (2학년 말에) 했다.

 

 

[나의 불장난 중학-3학년-때 여친을 만나다]

 

첫 번째는 동래중학교앞에 사는 여학생이였는데 실패작. (그당시 친구들 사이에 이런 장난이 심했어) 그런데 세상참 좁지, 결혼하고난 뒤에 알고보니 wife하고 친한 친구였다. 어럴때 Oh, my goodness라고 해야하나.

 

또 하나는, 나의 처도 알고있다. (아이들의 불장난 이었어니까 결혼후 언젠가 말을 했다)

초량 살 때 우리집에만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내가 평행봉을 마들어 세우고 운동을 하곤했었다. 그때는 제법 평행봉상에서 물구나무서기까지도 했었다.

(국민하교 6학년때 철봉 차오르기까지 한 실력이었어니)

 

매일 물길러 오는 예쁘장한 여학생 안모양이있었는데 장난 삼아 친구를 만들었지.

내 실력으로 대문에서 내방까지 초인종을 달았지, 그야말로 아이들의 불장난이었다. 매일 근처의 수원지 산책도 학고 했는데 이것이 어른들에게 덜미가 잡혀 버렸지. 약2년뒤 대구로 이사갔는데 그후도 몇 번 왔다 갔다 만나곤 했다. 내가 중학교의 조수로 가고난 뒤 바빠서 자연적으로 헤어졌지.

그후 그는 시집가고 나는 장가가고 각자 제 갈길로 가버렸지.

지금 새각해보니 웃음만 나는군. -하하하-

일장 춘몽이라고 해야하나? 그후 착실한 학생으로 돌아왔지.

 

 

[형님의 사망]

이이야기를 하기전에 자형 [ 姉兄 ]에대한 이야기부터.

1940년경 좌천 시장의 요지에 그당시 보기 더문 현대식 2층 건물에서 포목상을 크게 하고 계셨다. 영리했고 장사수완이 뛰어났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난후 부산 초량에 와서 점포를 열었다. 혼란한 세상 탓에 양심 가지고는 해가가기 힘 들었지. 그후 초량의 중국거리(청과거리)에 점포를 옮겼으나 여의치 못하여 점포를 세를 놓고 다른 사업을 할 궁리를 형님과 같이 하셨던 것 같았다.

장사를 떠난난후 몇 달동안 소식 불통. 영영 소식이 없었다.

무슨놈의 이런일이 있나. 기다리고 기다러도 무소식.

결국은 집을 처분하고 형수 식구들은 영도로 나와 어머니는 큰누님댁의 방을 얻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어머님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부잣집 마나님이 이런 꼴을 당했으니. 나도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

 

 

[내재산의 공중분해]

아버지 생전에 동래중학 뒤의 조용한 곳에 별장을 지어셨다. 넓은 밭(아마 4~500평 정도가 아니었나?)에 집 두채-윗체와 아릿채 우물- 각각 삼칸집이었다.

아버님의 노후에 좀 살고 계셨다가 사후에는 막내몫으로 하기로 되어있었다.

나중에 어머님에게 들었는데 형님사업이 잘되면 더 좋는 집을 마련해 하고 처분 했다고.

부잣집 막네로 태어난 내신세는 하루아침에 빈털털이가 되고만 셈이지.

내팔자가 그런가보다.

 

 

[나의 다양한 취미생활]

해방된 다음해에 형님께서 skate(figure)를 하나 사 주셨다. 그당시 동래 일대에는 논이 많아 겨울에는 멋진 스케이트장. 동래 촌놈들중 그런것 가진아이는 내뿐이었다.

얼마나 좋았겠나. 그후 내가 구한 Roller skate타기.

하모니카는 일찍 초등학교때 배웠고 그후 기타(guiter), 아코디언, 전자올겐등. 그리고 올겐연주는 교사가 된뒤에 배웠자.국교 교사에게는 기본이었지.,

전기에 대한것은 이미 말했고, 중3때 중고 카메라는 하나 구했어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졌고 그것이 발전되어 나중에는 집(크고모댁에 있을때)에 암실을 만들어 현상 인화를 배웠고 확대까지는 못했다.(확대기가 고가니까)

장난끼가 도지면 남학생 여학생이 함께 앉아 있는 합성사진을 만들기도 하고.

 

그당시는 영어노래 한 두곡정도 모르면 사람취급을 못받을 정도.

내가 결혼 피로연때 내가 Italian garden, 어머니가 You are my sunshine을 불렀지 않았나.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건이였지. 참석한 사람들의 놀라운 표정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computer/Intrenet등등

음악감상이나 노래 불러는것도 좋아하지.

 

 

[그당시 유행 했던 pop song에 빠지다]

그당시 유행 했든 I went to your wedding, Too young, changing partner,

Tennessee waltz, Edelweiss, You belong to me등등 주옥같은 노래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네.

지금 돌이켜보니 나도 정말 별난 학생이엿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가지를 깊게 못한것이 유감스럽다.

제일 먼저 배운 노래는1951년도로 기억 되는데 대유행 된 노래- 길가는 강아지도 불러고 다닌다는- I went to your wedding-

배우고 싶은 마음은 많았으나 지금모양으로 다방이 있었나 집에 전축(audio system)이 있었나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배우기는 했으나 완전한 것은 아니고 흉내만 냈지. 지금은 완전히 알고 있지.

그당시는 이런 슬픈 노래를 왜그리도 좋아했던지?

제일 먼저 배운것이

I went to your wedding 그대의 결혼식에 갔었지 ( 노래-Patti Page )

 

I went to your wedding

Although I was dreading The thought of losing you

The organ was playing My poor heart kept saying

"My dreams, my dreams are through"

You came down the aisle, wearing a smile

A vision of loveliness

I uttered a sigh, and then whispered goodbye

Good bye to my happiness

Your mother was crying

Your father was crying

And I was crying too

The teardrops were falling

Because we were losin' you

You came down the aisle, wearing a smile

A vision of loveliness

I uttered a sigh, and then whispered goodbye

Good bye to my happiness

Your mother was crying

Your father was crying

And I was crying too

The teardrops were falling

Because we were losin' you

그대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대의 결혼식에 참석했었지

올겐이 연주되고 있을때 내 비참한 모습에선

그대의 꿈이 떠나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지

그대는 웃음을 보이며,교회의 복도을 통해

조용히 걸어 들어왔지

나는 한숨을 쉬며 나직히 말했지

그대여 안녕! 내행복도 안녕이라고

당신의 어머니도 울고

당신의 아버지도 울고 있었지

그리고 나 역시 울고 있어

당신을 잃게된 날 우리모두는

슬픈 눈물방울을 흘렸지

그대는 웃음을 보이며,교회의 복도을 통해

조용히 걸어 들어왔지

나는 한숨을 쉬며 나직히 말했지

그대여 안녕! 내행복도 안녕이라고

당신의 어머니도 울고

당신의 아버지도 울고 있었지

그리고 나 역시 울고 있어

당신을 잃게된 날 우리모두는

슬픈 눈물방울을 흘렸지

 

*웃기는 이야기 하나. 내 결혼 50주년 기념식때 기획사의 메니저양반 잘못 알고 있었는지 이곡을 방송하고 있어서 잘짝 귀땜해 주었지.

 

 

[부산중학교에서 물리실 조수를]

- “장학생을 만들어가지고 학교 졸업은 시켜줘야 될텐데..”

- “학교 물리실 조수하면서 학비를 전부다 대줄테니까 공부를 해라.”

 

그당시 부산중학교 선생님 중에서 고향이 동래사람이 한분 계섰어. 그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집안 형편을 알고 교장님하고 의논을 했어.

그당시에는 장학생이 없었거든, 장학제도도 없었고 장학생을 만들어가지고 학교 졸업은 시켜줘야 될텐데

 

그때 중학교 1학년, 2학년때부터 손재주가 있어가지고, 전기 라디오 같은거 집에서 만들기도하고 조립도 하고 했는데 그기 마 참 재미있데..

 

학교서 하는 말이, (그때 부산중학교에 물리는 물리실이 굉장히 컷다)

물리실 화학실 따로 있는데 물리실에 조수가 하나 있어야되는데,,, 화학실에는 하나 있었어..

 

외부 사람을 들일수도 없고 학생중에 좀 취미가 있는 사람 없나 하다가 어째 내 말이 나왔어.

 

그래서 학교 물리실 조수하면서 학비를 전부다 대줄테니까 공부를 해라.

그러니까 장학생인 셈이지.

 

2학년 말부터 3,4,5,6학년까지...

내가 중학교 6년 졸업했는데 1950년도 졸업했으니까.

 

그때까지는 6년제고 이후는 중고등학교가 완전히 분리가 되었다.

과학실 근무는 3학년때부터 였다.

 

가정 형펀이 이러했으니대학갈 생각은 하도 못했다.

 

 

[야방중에 집에 무장 결찰이 임금하러옴]

 

중3때 어느날 밤중에 무장 경찰이 들어와서는 이집에 간첩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면서 가택수색을 시작, 내방에는 그당시 여기저기 라디오 조립 하던것 그박에 여러 전기기구들 마치 고물상 같았지.

가택수색을 한 끝에 나보고 넌 뭐하는 놈이야,

신분과 취미같은 것을 듣고 난 다음 음 음 알겟구만 저방에서 족보를 보았어 신분은 확실 한것 같에.

나중에 알고보니 밤 늦게까지 삐 삐 하는 소리가 난다고 혹시 간첩이 무전 치는 소리로 오인 하고 신고가 들어왔다고.

리디오 조립하고 시험 작동을 할때 많이 나는 소리야, 특히 그당시 물건들이 고물이 많았으니까. 요즘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지. 온식구들이 얼마나 놀랐겠나.

 

[물리실 조수이야기 게속]

 

학교졸업한 것도 학교서 장학금 받고 공부 한 기지. 그러니까 공부가 잘 되나

그당시에는 라디오나 마이크 같은 게 다 고물이가야. 아침에 조례할 때 마다 삐삐거리고 소리 잘안나고 애 많이 먹었어요.

 

아무리 손을 봐나도 중고품이거든 새것이 아니고 중고를 사다가 조립해놓으니 맨날 애 먹었는 일이 일쑤였지.

 

그 긴장 되는 심정은 해 본사람외에는 상상도 못 할거야. 그 덕분으로 졸업은 무사히 했고 졸업후에도 계속 하기고 했다. 중학 교사 검정시험이나 쳐보려고.

 

 

[6.25 전쟁]

1950년5월에 졸업을 했다, 그때 나는 대학교 시험칠 꿈도 안꿧고..

학교서 하는 말이 딴데 갈 생각하지말고 여기서 조수로 있으면서 검정시험 준비를 하라고, 그래서 있기로했다.

그러나 학교를 미군들이 육군병원으로 사용했고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임보관으로 쫒겨났다.

학교건물 없는 곳에 내가 있을 필요가 없어서 그만두고 나왔어. 그러나 학교측에선 만류을 했었지만.

 

 

[잠깐 동안 ckecker 생활]

친구 형님의 도움으로 첵커를 조금 했었다. 미군 군수물자를 싣고오는 배에서 하역하는 물자의 수량를 계수하는 일이지. 마음 잘 못먹고 눈 한번 감아주면 큰돈을 만질수 있는 곳이었으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만 두고 말았어.

 

 

[영어 통역사로 취직]

당시에 부산 철도국을 미8군이 장악을 했어. (미 제8군 724 철도수송대대)

미국군인 대령 국장이 하사람있었고 한국국장이 한사람 있었다.

통역을 아주 잘하는 통역관이 한분있었고 역마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있었다. 간단한 테스트 끝에 운 좋게 체용이 됐어.

처음 간곳이 좌천역인데 나라고 또 다른 사람하고 두사람이었어.

둘이서 이야기 많이 했지, 어떻게 인사하고 어떻게 통역해야지--

그당시 좌천역에서 증기기관차에 급수를 했었다. 매우 중요한 장소이었지.

 

미군들의 말이 왜그리 빠른지, 고생 많이 했지.

한번은 (아마 겨울철)시장가는 겸해 꽃좀 사달라기에 이 겨울에 무슨 꽃이 있니라고 하니 어제 보았다는게 아닌가. 말다툼 하다가 결국은 두사람이 같이 가봤는데 이게 무슨놈의 일인가. floure를 flower로 들었어니. 말의 앞뒤를 생각하면 쉽게 알 텐데 그당시에는 몰랐지.

 

일년후 나는 우암역으로 전근 했고, 먗달뒤 부전역으로 전근했고 몇 개월후 모든 통역들의 희망지인 부산역 R.T.O에 전근 되었다. 기초부터 일을 차근 차근 배워온 셈이었다. 아마 찰도국에 근무하고 있던 조카되는이의 배려였다고 본다.

 

이 자리는 부산철도국뿐 아닌 미군수물자 수송의 총본부였다. 막중한 책임을 맏고 있었다.

1953년 정전후 군복무 문제가 해결이 안될 지경에 이러렀다.

 

 

[아 초등학교 정교사가 되어야 겠다.]

그당시에 초등학교 1급정교사는 병역법 제63조에 의해서 병역이 면제 되었거든 그래서 초등학교 정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 했는데 때마침 부산사범학교 연수과(고교 졸업후 1년 수업)생 모집이 있어 응시 했지. 수업료는 국비 지급.

응시생이 어찌 그리 많던지 아마 9대1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나는 고교 졸업 3년후이고 나머지의 대다수는 그해의 졸업생이었다.

다행이 합격은 했으나 직장에 나가야만 두식가 살아 갈것 아니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때 우리는 하루 3교대 근무였다. 08.00~16.00, 16,00~24.00, 24.00~08.00

나머지 두명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야간근무만 내가 맡고 나머지는 두사람이 교대근무 하라고 했더니 좋아하던군. 저희들은 야간근무가 없으니.

그곳에는 미군 장교들도 있고 하니 비교적 좋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몇 개월 해보니 이것 정말 할 짓이 아나였어. 학교 수업에 지장이 막대했다. 출석은 가끔 대리출석도 해주고 했으나 문제는 시험이었다. 시험날은 출석해서 시험을 봤으나 성적이야 안봐도 뻔할것 아닌가.

학년말 가까이에 담임에게 호출되어 가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

출석을 잘하기로 약속하고 일단락은 됐으나 문제는 졸업이 되느냐 또 졸업이 돼도 배치 또한 큰문제였다.

 

 

[교생실습.]

이것은 필수적으로 겎어야 하는 과정이다. 부산 사밤학교 부속국민학교에서.

지금 생각해도 긴장이 되네.

한 학급에 3~4명씩 배치가 되어 수업참관 생활지도 연구수업등이다.

이곳 아이들은 매년 겪는일이었다. 얼마나 영리하고 달고 달아서 어른 뺨칠 정도였다.

지도교사의 전공이 미술과여서 미술과 연구수업이 지정 되어 수업안 작성 자료만들기등등 사전 준비가 막대했다.

40분 수업하는데 준비단계가 무려 10여시간나 걸렸다. 수업당일 그놈의 40분이 왜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종료 신호가 울리고 나니 전신에 땀이 흐르고 정신이 하나고 없고.

그런 고통을 수차례 마치고 교생실습 끝.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발령 받음]

그당시는 경상남도 부산시였다. 지금은 부산시내에만 배치되나 그당시는 경상남도 일대가 대상지였다.

성적순대로 배치 했다.부산시내는 불과 볓자리뿐이고 나머지는 경남일대.

6.25직후라서 함양이나 산천같은 곳에 가면 죽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곳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천지라고 들었다.

걱정이 태산이었지. 노모를 모시고 있었으니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이도 부산에서 가까운 온양국민학교였다.

좌천영-월내역 다음이 남창역이 아닌가. 정말로 하늘의 도움었나.

 

지금까지 겪어나온 위기때 마다의 행운은 나의아버님이 닦아 놓으신 은덕이었다고 확신한다.

 

 

3장. 결혼 초기 : 교직 부임, 결혼, 자녀 출생 (1954 ~ 1968)

 

[교직 부임]

1954년 5월 울산군 온양초등학교 부임. 울산군 온양면 남창리에 있는 18학급인 학교였다. 온양면이 고향인 우병규라는 친구하고 같이 부임했다.

다행히 학교 사택이 있어 숙소는 해결 되었다. 그곳이 고향인 사람 외에는 모두 수용 되었다.

그런데 이곳만은 전기가 들어오질 안했어 고생 좀 했지. 저녁밥만 먹고 나면 자야 하니까. 그의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 있으니 밤에는 술자리가 자주 있었다.

그때 함께 근무한 분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동래 중학 후배 이 동원 선생]

학교 옆동네에 살았던 이동원씨 집이 갑부이고 홀아들인 사람인데 별다른 직압을 못가졌던 그는 임시로 강사로 근무 하고 있었다. 나학는 아주 친해서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내가 결혼후에도. 일년중 강정이나 달술같은 먹걸이가 준비돼 있었다. 그당시 귀했던 축음기도 있었고, 나의 처도 음악을 좋아했거던.

어떤날을 자고 오기도 하고 또 빌려와서 듣기도 했다. 참 귀한 물건이었다.

내의 결혼식에 참석도 해주었고, 그런데 내가 부산으로 전근 온후에 오트바이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다. 아까운 친구였는데.

그곳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선생이 두분 있었는데 나의 처의 후배인 한정순, 그리고 이북이 고향인 강선생등은 말할 상대가 되었지. 방과후에 여가가 있으면 같이 어울려 노래도 불르고 서양춤(댄스)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시골 학교에서의 좋은 추억거리의 하나였지.

 

 

[여러번의 혼담]

노모하고 두사람이 있는걸 보고는 딱했던지 육성화장님(차씨)이 고산리에 좋은 규수가 있으니 장가 들라고 몇 번 말이 있었으나 나는 이곳 촌사람을 아내로 맞이 하기 싫어서 차일 피일 했지.

그후에도 형수님이 자기 친가 집안 처녀를 한번 보러가자고 해서 일요일날 가기로 하고 동래까지 왔었지, 그런데 그날 따라 시외뻐스 총파업날이여서 허탕치고 말았어. 이연이 아니 였던게지.

 

 

[착한 집사람과의 만남]

큰누님의 시갓쪽 할머니되시는 분이 중매를 해서 지금의 장모님을 큰누님댁에서한번 만나 뵙고 그후 누님 두분이 처갓집을 정식 방문이 아니고 살림살이가 어떤지 한번 살펴보고 오셨다고 들었다.

장인될분은 젊어서 외국에서에서 상업을 하셨고 혼삿말이 있었던 당시에는 무직상태. 장모 되실 분은 쌀의 대상인(大商人)이셨디. 생산지에서 구입하여 화차에 싣고 부산에와서 도매할 정도였다. 여장부이 셨다. 영리하신 분이셨다.

딸 셋중에서 제일 똑똑했고 아버지 잘모시고 집안살림 잘살고 동생들 잘 돌보고 처갓댁에서는 사장급되는 사윗감을 원하고 있었다고. 그러니 나같은 빈털털리인 나에게 생각이나 있었겠나.

 

시어머니에 대한 정성은 두말 할 것도 없었고, 남편 잘 받들고, 그야 말로 쥐꼬리만한 공무원봉급으로 한때나마 아버지 없는 큰댁 조카들 셋을 친자식 이상으로 돌봐 주었던 일, 시댁일가 친척이나 이웃에 대한 깊은 배려 등...

 

 

[큰집 조카들과 같이 생활]

그무렵 공무원의 봉급 수준은 ,그야말로 형편 없었다. 5일에 한번 서는 시장가는것이 유일한 낙 , 갓시집온 샛씨의 유일한나들이. 쥐꼬리만한 돈으로 어머님의 간식, 부식 그리고 집안에 필요한 물건들. 한창 먹고 싶은것들이것들 많았을 신혼때 아니었나. 사장에 팔고있는 먹걸이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나. 지금 내가 생각해도 정말 정말 미안한 생각이 난다. 못난 신랑을 만나서.몇십년 지난뒤에 그 말을 하는것이 아닌가.

형수이 조님카들 키우기가 힘드니 동은이를 보내고 혜년이가 왔고 또 석년이가 잠시 머물다가 갔다.

상년이는 사범학교에 다녔고 동은이는 초등학교 졸업후 부산으로 석년이는 교환수로 취직 한후 떠났고 혜년이는 당분간 머물렀다. 동수 키울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어머님과 우리 내외 세사람 살기도 힘 들었는데 그당시의 생활고는 물론 시어머니에 대한 정성은 두말 할 것도 없었고, 남편 잘 받들고, 그야 말로 쥐꼬리만한 공무원봉급으로 한때나마 아버지 없는 큰댁 조카들 셋을 친자식 이상으로 돌봐 주었던 일, 시댁일가 친척이나 이웃에 대한 깊은 배려 등. 자기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은 --라 한다지만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초임교에서의 3년은 정신없이 흫러갔지. 병아리 교사 시절이.

 

[첫째의 태어남] -1956.3.20-

동수의 출생, 또 한 아기의 사산=死産(남자아기) 다행이 그동네에 일본사람 산파가 계셔서 삼모의 생명은 구했었다. 그후 한번 찿아 갔으나 다른곳으로 이사를 해서 만나지는 못했다. 생명을 구해주신 분인데. 또 한분 어버니의 유일한 친구 떡장수 할머니도 이사 가고 안 계셨고

 

 

 

 

[3년후 부산 대연국민학교로 전근] -1957-

교감 강습을 가라는 통지서와 부산정근의 두자리를 놓고 나는 부산쪽을 물론 택했지. 그당시는 경남에서 부산으로 오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당시의 대연동은 주위가 모도 논밭뿌인 사골이었다.

 

 

[어머님의 사망]

대연교에서의 큰일은 어머니가 노쇠하셔서 작은누님댁에 계시다가 임종은 사촌인 덕명형님댁에서 하셨다. 부잣집 마나님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셨을때는 --- 참으로 외로웠다.

온양학교에서 문상하러온(우병규, 황보식,이일두등) 친구들은 정말 고마웠다. 내가 맨 막네였으니 사촌형들은 모두 청장년이었어 초상일은 무사히 잘 끝났다.

동래에있는 우리 산소에 모셨지.

일주년 기일에는 학교 친목회와 학부형님들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지방 유지인 집주인 내외의 도움도 컸다.

 

 

[학교 사상 최고의 지학률]

그당시는 소위 말하부는 일류중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는 선샌님이 최고인 시대였다. 부임3년만에 6학년을 맡게 되었고 내가 맡은 여학생반은 아동수가 무려90여명. 5학년에서 6학년 올라올때 반편성을 했는데 학교 경영상 4반을 3반으로 줄였던 결과이다. 남자2반 여자1반. 아마 알려지기로는 사상최초로 최대인원수을 수용한 것이었었을것이다. 다른 두반 선생님은 중년급었다.

피나는 노력을 했지. 아동들중 똑똑한 애들이 많았지.

그당시 대연학교는 동부관활이여서 남학생은 부산중학 여학생은 경남여중.

그학교는 매년 부산중 경남여중 각각 한명정도가 고작.

경남여중에 무려 십수명 원서를 냈다. 학교측에서는 많다고 마류했었지.

내고집이 통해서 원서를 접수시겼지 그것도 첫날에.

수헙번호가 1 ,51, 101, 151 201--이렇게 나오든군.

12월 초에 입시가 있었다. 일각이 여 삼추란 말은 이럴때 쓰는구나 ---.

합격자 발표는 라디오방송을 했다. 발표당일은 초긴장. 드디어 발표가 시작되었는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1번 51번 101번 151번 201번 ---이렇게 5명이나 합격 했지.

학교뿐아니라 대연동 전체가 잔치분위기였지.

수고했다고 다음해에는 1학년을 담임했는데 6학년 담임 임모교사가 교노조관계로 산골로 좌천당하고 그반을 2학기에 내가 맡았는데 결과는 별로였다.

 

 

[둘째의 태어남] -1958,8,1-

욱이는 학교사택에 있을 당시 초량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당시는 주소를 대연동 대연국민학교 사택으로 모든 것이 통했다. 그래서 출생신고에도 그렇께 썼는데 호적부에는 대연동 번지미상---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이 많다. sorry

 

 

[살림살이가 조금불어남]

그당시 대다수 돌료들은 학교옆의 난민주택(개인소유)에 살고 있었고 몇사람만 전세신세였다.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몇 번을 옮겼는지 3~4년 후에는 사택으로 이사를 했고 또 석포동에 신축한 난민주택을 한체 장만했다. (전세를 놓았음) 제봉틀도 한 대 장만하기도 했다. 식모(가정부)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약2년쯤뒤에 남의 꼬임에 빠져 도주해 버렸슴.

 

 

[셋째의 태어남]-1961.8.12-

셋째도 둘째가 태어난 산부인과에서 출생. 원장님이 잘 아는분이었는데 셋째도 아들이라고 축하 훅하.

 

 

[영도 국민학교로 전근] -1963-

영도학교에는 조카인 상년이가 먼저 부임해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소개말씀-차윤명선생님은 ~~~의 삼촌(작은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자 한바탕 웃음-하하하-

나는 시청각기자제를 담당했었다. 한때에는 야구부 부감을 맏기도 했었다.

-중학때 취미로 야그를 좀 했다고- 몇 달후에 야구부가 해산되었고 그만 두었어.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여서 기자제가 촣은것들이 많았다.

음악연구 지정학교로 지정되어 업무가 많았다. 녹음기 환등기 over head환등기등등, 음악주임인 조모교사와 나하고 두사람은 정말 바빴다.

그때 세로 구입한 S모회사의 녹음기는 정말 휼륭했다. 양쪽에 둥굴고 큰 릴(reel) 이 두 개 달렸고 4번 녹음 되는것이었다. 참으로 멋있는것이었다. 이런 기구를 다루는 나 도한 자랑스러웠다.

 

*참고로 보통 사람들은 테입에 녹음이 앞 뒤양면으로 되는줄 알고있는데 실제는 tape의 상단에 한번 하단에 한번 녹음됨*

 

 

[낯익은 어린이가 운동장에 ]

언젠가 방과후 운동장에서 야구연습을 하고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듯한 3~4세 가량의 남자아이가 걸어와서는 학교 뒤쪽으로 걸어가는것을 딸아가봤더니 혼자서 울고 있길래 자세히 보니 혁이였다. 집에서는 실종신고를 하고 야단이었다.

그당시 경찰기동대가 훈련하러 자주왔었다. 집근처에 부대가 있었는데 아마 그들 뒤를 따라 온것 같았다.

 

 

[둘째를 버스에 두고 내리다 ]

한번은 밤에 처갓집에 다녀 오는 버스를 타고 오다가 (그당시는 아이가 셋)내렸는데 둘째가 보이질 않았다. 졸고 있는것은 모르고 차에 두고 내린것이다. 앗차 큰일 났구나. 급히 젊은이 한사람과 텍시를 잡아타고 가사에게 이야기하고 그 버스앞에 정차하고 버스에 올라가보니 졸고있질은 안나. 휴!!!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아찔하네. 그젊은이가 가동대 순경인것을 확인하고 다음날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대교 초등학교로 전근 ]

4년뒤에 대교국민교가 신설되고 학생과 교사가 영도교에서 분리되었다. 학생들은 주소로 해당자를 보냈고 선생님은 장기근무한 차례로 옮겼다. 나도 옮겼다.

신임 교장님이 김모라고 나의 초등학교 은사가 아닌가. 좋은점도있고 나쁜점도 있었다. 나쁜점이 좀 많았었다.

 

 

[넓고좋은 집으로 이사, 막네의 출생 -1968.7.12-]

영도에서 세 번째로 옮긴 집이 일본사람의 모회사의 사택(社宅)으로 썼던 집으로

넓고 좋았다. 막네는 이집에 이사온후 출생(산부인과).셈물 길어먹기가 좀 힘들었다. 그당시 영도일대는 식수난이 심했다.

 

[.TV를 샀다 ]

이집에 이사온후 멋진 일제 도오시바 TV를 구임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그마을에서는 유일했지. 동네사람들과 구경 잘했지.

 

 

[.시립공원묘지에 할아버지 묘 이장 ]

우리 집안의 묘지가 있던곳의 주위가 개발되어 묘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립공원묘지로 이장을 했는데 누님 두분의 반대로 부모님의 묘소는 화장을 했었다.

이장하면 자기네들 자손이 잘 못된다느니 뭐니 말도 안되는 소리로---

두분다 생각이 매우 구세대였지.

 

 

[드디어 우리집을 마련함 ]

남의집 전세생활 십수년만에 드디어 우리집을 마련했다. 그동안 집사람의 고생이 이만 저만한것이 아니였다.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양정동에 점포가 3개 있는 집이었다. 월세라도 받아서 생활에 도움이 되게. 목욕탕도 하나 만들었다 .

그러나 점포가 잘 운영이 안되고 월세도 잘 안들어오고 또한 미장원점포 주인이 골치꺼리였다. 야간 도주를 해버렸어. 그 뒷정리 하느라 골치 아팠다.

한해는 비가 많이와서 마루까지 물이 차기도 했다. 집이 길보다 낮았기 때문이었다. 집은 절대로 길보다 높아야 한다는 경헝을 얻었다.

근처에 사는 내 친구집은 집은 반파되기도 했다.

 

 

[전포가 딸린 새 집으로 이사 ]

나의 적은 수입에 보탬이 될가해서 부업을 할 목적으로 집을 옮겼다. 위치는 동네 가운데이고 길 모둥이였다.

 

 

[부업=아폴로 문방구 개업과 아내에 대한 감사 ]

업종을 문방구로 정하고 과학기자제, 운동구, 월간잡지,연말에는 연하장등등.

집사람의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였지. 집안살림에다 아이들 넷 뒷바라지,점포운영 등 정말 고생 많았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해도 모자란다. 학교부근도 아닌데 무슨 문방구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동네가운데에도 괜찬거든요. 방과후에는 나도 과외지도를 했고. 두사람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약1~2년 계속했다. 수입은 내가 받는 봉급수준에는 조금 못미쳤지만 살림살이에 도움이 컸다. 우리 황정순여사 화이팅!!!

 

 

[처제에게 점포를 인계함 ]

잘 되어가던 점포를 장모님의 간청으로 처제에게 인계안하면 안될 입장이 생겼다.

정말로 곤란했다. 처제가 잘 해내지 못할것을 뻔히 알면서도.

얼마 못가서 미정이가 점포를 봐주기로 한 모양이더라. 얼마 못가서 장사가 잘 안되서 문을 닫고 말았어. 우리 내외는 동네사람 보기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좀더 큰 집으로 이사 ]

광안동에 좀더 좋은 집으로 옮겼다. 마당에 연못도 있고 정원수 그리고 목욕탕도

있었다. 방이 네 개였어 한칸을 전세를 놓았다. 그마을에서는 무엇을 보고 말했는지 행복한 가정이라는 평이 나기도 했다. 집사람이 워낙 살림을 잘 했으니까.

 

 

[해양소년단 인솔 ] -1980,8-

성서학교에 있을때 초중고의 해양소년단을 일솔해 일본 (2박3일)다녀옴. 그당시는

해외여행이 허가 되지 않을는데 좋은 기회였다. 옷차림은 멋있는 해군장교 복장을 하고서. 떠날때는 집사람이 막네와 함께 부두까지 전송하러 왔더군. 난생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었으니. 돌아와서도 학교내에서는 대 인기였다.

 

 

[아파트로 이사함]

아파트가 여기 저기 시작할 때였다. 광안동에 봉황맨션이 신축되었다. 모델하우스를 몇 번 돌아보고 또 보고 이제 우리도 아파트생활 한번 해보자하고 계약을 하고 약 일년반쯤 뒤에 입주 했다. A동201호였다. 그떄의 기쁨이야 어찌 말로 다 할까.

50세대의 소규모 단지였다. 단지내의 주민들 사이에는 모범가정이라고 소문이 나 돌았다. 자식들 착하고 집사람 살림 잘 살았지 내보기에도 모범가정이였다..

 

 

[집사람의 부부영상 편지 당선]

부산 MBC TV의 부부영상편지에 당선이되었다. 방영될 약3주쯤전에 논화하러 집에 왔었어.

나는 조퇴를 했고 전 식구들이 다 모여 있었어. 녹화 담담 엔지니아들이 집안의 여러곳과 식구들이 즐겁게 놀고있는 장면, 그리고 우리 부부가 대화하는 장면은 아파트의 놀이터의 그네위에 앉아서 촬영했다.

녹화가 그렇게 힘들줄은 물랐다. 찍고 또찍고 다시 또 찍고, 촬영 기사는 물론 온식구들이 진땀을 흫렸다. 동네사람들은 구경꺼리가 생겼다고 야단들이었다. 녹화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방영은 1989. 7 .1 부산 MBC TV에서. 집안식구들은 물론 학교직원들도 시청했다.

TV의 방영효과가 그렇게 클줄은 몰랐다. 이웃들은 물론 시장사람들 목욕탕 주인,그 밖에 아는사람을 만나면 인사부를 하고 했다. 동네의 자랑꺼리가 되었다.

출연상품으로 아네는 일류 메이커의 옷 한 벌을 받았다. 아주 고가의 멋진 옷이었다. 그글을 소개하면

 

 

나의 영원한 동반자며, 길벗인 당신에게

 

- 1989. 7 .1 부산 MBC TV 방영 부부영상편지 당선작 -

 

여보, 우리가 결혼 한 지 어언 35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몇 번이나 변했는지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케 하는군요. 금년에는 당신의 회갑을 맞아 더더욱 감회가 깊어지는군요. 변하지 않는 것은 만날 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우리들의 마음.

 

나는 결혼초야에 당신하고 약속했지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의 끈을 꼭 잡고 절대 싸우지 않고 살겠노라고. 부부가 오손도손 의논하고, 정답고 따뜻하게 한 계단, 한 계단 성실하게 살아 갈 것을 우리는 맹세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소녀 시절부터 꿈꾸며 가장 갈망했던 것이며, 그런 이유는 저의 친정 부모님의 생활상을 보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스럽게 화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던가요. 당신은 다행히도 인자하시고 자상하시면서 자기 책임을 철저히 완수하며,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항상 당신이 부족해서 잘 못해 주어 미안하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당신께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서로 예의는 있어야지요. 제가 잘못할 때가 더 많지요. 언제나 양보하는 당신, 사람이 살다 보면 잘못이 더 많고 뜻대로 되는 일이 그리 쉽나요. 하나 부부애의 끈으로 풀어 가야지요.

 

결혼 초부터 몸담아 온 직장을 한길로만 걸어온 당신. 이제 자식들도 다 장성해서 결혼해 다들 직장따라 따로 살고 있고, 막내도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고 나니 우리 부부만이 남는군요. 제각기 갈 길을 가는 것이 순리인지라 자식들이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스럽습니다.

 

자식들은 당신의 직장인 학교가 집 가까운데 있어서 편리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이 신혼여행도 못 가보고 신혼생활도 못해 봤으니 이번 기회에 신혼으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즐겁고 건강하게 사시라고 하는군요. 때가 되면 아이들이 잘 모시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당신의 회갑을 축하드리며 건강을 빕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걸어 온 길을 좀 더 아름다운 꽃길로 가꾸면서 당신의 동반자로, 또 길벗으로 영원히 함께 가겠습니다.

 

당신의 아내 황 정순 드림

 

* 남편의 회갑을 축하하는 편지로 TV 방영 후 좋은 평과 부상을 받고, 부부가 함께 회갑기념 일본 일주 여행을 다녀왔음.

***(1989. 7. 1 부산 MBC TV 방영)

 

 

[부산일보 글마당 당선]

- 부산일보 글마당 (운문부) ‘봄’ 당선 (2002. 3. 29)

경사가 또하나 이번에는 부산일보에 짝품 발표됨. 소개하면

 

 

소리 없이 입맛에서

내 발을 멈추게 하네

봄 내음이여

또 다정하게 속삭이누나.

 

봄이 온다고요

땅 밑에 움츠렸던 생명들

기지개 펴면서

쑥쑥 얼굴을 내밀고,

햇빛 쪼이며 옹기종기

아! 언제나 새로운 봄이여.

 

봄이 오네

말없이 내 곁에 다가와

손을 잡고 끄는구나

봄 동산으로.

 

봄바람에 머플러

하늘하늘 멋을 내고

가고 오고 새 소식

새 희망의 씨를 뿌리며

아! 언제나 새로운 봄이여!

 

※ 2002. 3. 29 부산일보 글마당(운문부) 당선작 (이날이 마침 내 생일이었다)

 

내가 집사람의 문학에 대한 소질을 일찍 발견하고 도움을 주었으면 훌륭한 문학가가 되었을텐데, 아쉬운 생각이 많이 나기도합니다.

 

 

4장. 자녀 성장기 : 자녀가 성장하고 막내가 서울로 떠나기 까지

(1969 ~1987).

가난한 집에 태어난 4형제들 아버지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길렀다. 그리고 공부시켰다. 그에 보답이나 하듯이 진학도 순조로웠다.

 

[대단한 네형제들 ]

 

[첫쩨의 동의 공대 입학 ]

화공과에 합격.

 

 

[둘째의 동아대 입학 ]

전기 제어 공학과에 합격.

 

 

[셋쩨가 서울대학 입학 ]

셋쩨가 서을 공대에 합격을 했다. 그 기쁨이야 어찌 다 말로할까.

아들 셋을 공대로 보낸 첫쩨이유는 우리나라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공학도를 많이 배출시켜야 한다는 나의 신념 때문에. KIST-KAIST를거처 박사학위를 받음.

 

[넷쩨가 연세대학 입학 ]

셋쩨가 떠나고 7년쫌 후의 이야긴데 막네도 서울로 갔다.(나이가 7년차)

그당시 가장 인기학과였던 전자공학과로.

.

[순조로운 결혼]

네형제가 모두 적령기에 순조롭게 결혼했다.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 아니고선 있을뻔 한 일이겠나. 감사 또 감사할뿐이다.

* 1983.11.27 -아리랑-

* 1986.1. 29 -부산호텔-

* 1987.12.27 -목화-

* 1996.12.22 -서울 교원공제회 예식장-

 

 

[잘들 취업했다 고마울 따름]

부모가 돈이 있나 빽이있나, 그당시에는 돈과 빽이 위력을 나타내는 때였다.

그러나 고맙게도 자기네들 힘으로 취업을 해 주니 그이상 고마운일이 어디있나.

그리고 작으나마 성의껏 신혼방을 꾸며줬다. 우리 부부로선 전력을 다했다.

 

 

5장. 다시 둘만의 가정으로 : 정년 이전까지 (1988 ~ 1995. 2)

 

 

[체육교실에 다니기 시작 ]

서면에 있는 노인들을 위한 체육교실에 등록하여 주(週)2회 다녔다. 노후에 둘이서 함께 나들이 하고 외식도 하고 즐거웠다.

 

 

[꿈에도그리던 해외여행 시작 ]

 

[가까운 알본 먼저 ]

막네까지 서울로 떠나고 나니 다시 신혼샐활이 시작되었다.

교사들은 일년에 두 번의 방학이 있지않나, 이 좋은 기회를 놓지지 않고 꿈꾸어온

여행계획을 짜고 실천에 옮겼다 가벼운것 부터시작 했다. 오사카,나라,쿄또.-일본애행은 쉽게다녀왔다.

 

 

[유럽 14박 15일 출발 ]

한 나이라도 젊을때 먼곳부터 갈려고 유럽일주 14박15일짜리를 여행사에 계약을 했다. 그러나 이놈의 일이있나, 그당시 당국에서는 공무원들의 해외여행을 자제했다. 교육공무원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가는것은 호화여행도 아니고 학생교육상 필요한것이었다.

학교에서는사여행신고를 하고 (영국있는 형님의 문병) 교육청에는 허가가 안날것이 뻔한 일이어서 출발 전날 오후에 신고만하고 출발해버렸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쓸레임이 마리 속에 떠오른다.

유럽 8개국을 먼저 택한 이유는 힘이 좀 있을때 멀리부터 다녀오자라는 이유.

서울공항에서 오전 8시에 만나기로 되어있어서 아들네집하고는 거리관계로 근처의 공항장에 투숙했다.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가진돈은 몸에 지니고 출입문은 두번 세번 단속하고 잠은 자는둥 마는둥 했고 세벽에 께어서 텍시로 공항까지. 가방은 왜그리 큰것을 준비했던지 지금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온다.

네델란드 항공기를 탔는데 대형여객기였고 승객은 그의 만석. 동쪽으로 날아가니까 가면 갈수록 해가 떠있는게 아닌가. 스튜디스가 남자였는데 웃음띤 얼굴로 정말 친절했다. 옆자리에는 아프리카 여인이었는데 왠놈의 향수는 그렇게 많이 뿌렸던지, 담요를 덮어쓰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한참을 지난다음 내가 먼저 인사를 청했다. 우리는 이런 이런 사람이고 ~ ~ ~. 영어로 의사를 통하니 참 즐거웠다.

아! 열심히 영어공부한 보람이 느껴젔다. 물론 여행중에도 그랬지.

우리 일정은 대형 버스 한대를 대절하여 유럽의 남쪽인 이테리(로마)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가면서 주변국가를 차레차레 방문하는 여정이었다.

이테리-바티칸왕국-프랑스-오스트리아(오스트레일리아가아님)-독일-스위스-터어기-폴란드-영국 이런 차례였다.

우리 부부는 정말 즐겁게 15일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것도 우리 4형제와 머누리들의 염려해준 덕으로 생각한다.

 

 

[하우스텐보스느규슈 ]

하우스텐보스는 17세기 중세유럽의 네덜란드의 재현한 체재형 리조트랍니다.

 

 

[호주 뉴질랜드 ]

여행 일정상 호주 일원과 뉴질랜드 남섬일주.

 

 

[캐나다 일주 ]

[캐나다 벤쿠버 / 빅토리아 / 캘거리 / 휘슬러 / 밴프 / 나이아가라 / 퀘백 / 몬트리올] 부차아더 garden(정원)은 정말 세계최고였다.

 

 

[중국 여행 ]

상해,북경,서안등 9개도시와 자금성 만리장성등.

 

 

[대만 여행 ]

대만일주.

 

[동남아 여행 ]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 말레이시] 인도차이나반] 캄보디아(앙코르왓) / 베트남 / 싱가폴 / 홍콩

 

 

[미국+하와이 ]

로스엔젤러스 / 샌프란시스코 / 라스베가스 / 뉴욕 / 보스턴 / 씨애틀 / 올랜도 / 마이애미 / 하와이등

 

 

[케나다 ]

밴쿠버, 빅토리아, 밴프, 캘거리, 나이아가라, 토론토

나이아가라 폭포는 미국여행시 한번 케나다 여행시 한번 두 번 방문할 기회를가졌다.

 

 

[cruise여행 ]

평생 소원으로 유람선 여행을 바라고 있었는데 호화유란선은 기회가 없었고 마치 부산에서 요꼬하마까지 가는 코스가 신설되었기에 참가하였다. 육상여행보다는 또 한 다른 맛이 있었다. 여행을 즐기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아네는 정말 즐거워했다. 여행할 때 마다 일행들과 잘 어울렸다.

 

 

6장. 인생은 정년 이후부터 : 또 다른 시작 (1995. 3 ~ 현재)

 

[Mbc-Tvc-TV와의 단독 인터뷰]

1994년 12월초의 어느날 Mbc-Tv에서 학교에 찾아와 금년도 정년퇴직자 150여명의 대표로 인터뷰를 갖는 영광을 가졌다. 교직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애로와 문제점에 관한것이었다. 3일후에 방영이 있었다.

 

 

[나의 정년퇴임]

미락교를 마지막으로 교직생활 40여년을 마감했다. 회고해보면 1954년부터 1995년까지 많은분들의 도움으로 대과없이 마치게됨을 오직 감사할 뿐이다.

 

 

[국민훈장 동백장 받음]

대통령 휘장이 세겨진 시계와 훈장을 받고 교직생활의 대단원을 마감했다.

돌보아 주신 모든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제2의 인생시작]

40여년을 국가의 녹을 타 먹고 살았으니 이제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환원하기 위해 봉사 할 일만 남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부터 시작]

퇴직 1년전부터 영어회화공부를 시작했다. 현사회에서 유일한 무기가 아겠는가.

1년간은 독학을 했다. 유일한 교사는 EBS영어 방송과 오성신 선생이 진행하는KBS의 Good morning pops였다.

정말로 열심히 했다.(두 방송이 아침 6시~8시)교제도 구입하고 녹음도 하고(녹음을 필수적---나중에 다시 듣기 위해.

퇴직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영어학원에 등록하여 약3년간 학우공부했다. EBS영어 방송과 오성신 선생이 진행하는KBS의 Good morning pops는 계속 했다.

Good morning pops에는 계속 전화연락 또는 퀴즈에 응모하여 상을 많이 타기도 했다. 사전, 전자사전, 청바지, 배낭, 멋진 중형 audio set, 또 집사람도 예쁜 audio set등등.

또 한번은 8월에 내외가 서울 studio에 ‘이럴땐 영어로’라는 프로의 녹음에 초청되기도 했다. 하루 10여분씩 하는 방송내용의 녹음를 하루만에 다 하는것이었다. 전국각지에서 약10여명 모였두였는데 우리 내외 외에는 모두 젊은이였다.

studio안은 왜그리 더운지. 우리 내외를 만나러 온 막네 내외도 녹음작업에 참석되었다.

EBS에서는 영영사전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

 

 

[각종 강습 수강] -영어-수영-수지침-

영어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부산 사회 체육센터에서 실시하는 수영, 수지침등, 또 수영은 좀더 환경이 좋은 사직동의 시립수영장과 서면에 있는 적십자회관에서 계속 했다. 수지침은 기초과정만 수료했다.

 

 

[칠순잔치]

1999,11,15 전가족이 모여 그렌드호텔에서 즐겁게 치뤘다.

 

 

[금혼식 - 아네의 글모음 출판]

2005,1,8 (2004,12,24일이 50주년 되는 날인데 사정으로 늦추어짐) 많은 하객및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한글서당의 외국인 학생들과 성대 하게 치루어졌다. 그야말로 국제적인 금혼신이었다. 아네의 글모음 출판식도 같이 했다.

 

 

[대우마리나 아파트로 옮김]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대우 마리나로 이사를 했다. 몇번 살펴보고난 뒤 계약을 하고 이사를 했다. 막네까지 서울로 간 뒤였으니 제2의 신혼생활의 시작이었다.

외국사람들을 초대 해서 한국사람의 가정생활을 공개하기도 했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John은 자기 모친하고 자고 가기도 했고, 일본 사장 ‘나가아’씨를 초대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이 만난 우리에게 이런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모두가 좋은 아네와 자식들 덕으로 생각한다.

 

 

[부산자원봉사센터에 등록]

1997년부터 외국인을 위한 한글교실에 참가했다. -뒤에 소게됩니다-

 

 

[김해공항 국제선청사 Information center파견근무]

부산시의 요청으로 약5년간 영어,일어통역 봉사를 했슴.

집에서의 거리는 좀 멀었으나 정말 보람있는 일이었다.

옆자리의 한국관광공사의 김양, 그옆의 경남도관광의 김양 둘다 정말로 친절하고

좋은 아가씨들이넜다.

 

 

[결혼식 주례]

이런 인연으로 김양의 결혼 주례를 맏기도 했다. 그후 한글서당 김양과 미국인 willams의 주례도 맡았었다.

 

 

[시-걸 만찬회 초대받고 상도 받음]

*시-걸(sea gull)갈매기란 뜻. -공항과 항구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잔치었다. -코모도호텔에서-

만찬회에 초대되어 회식후 제2부에서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김해공항 안내 desk대표로 나가 영어와 일어로 자기 소개를하고 나의 18번‘ 차표 한 장’을 불렀는데 뜻밖에도 1등상을 받았어.

부상은 코모도 시당 식권 4장이었다. 그후 아네와 두 번가서 잘 먹고 왔어요. 아마 나이 많은 덕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네의 치아가 나빠기 시작]

아네의 글모음에도 있드시 이가 나빠지기 시작하더군요. 인근에서 잘 한다는 치과에 가서 치료를 시작, 의사는 치료가 끝났다고 하나 환자 본인은 No.

하는수 없이 다른 차과로, 또 다른 치과로. 이렇게 해서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치과를 다녔다. 나 도 맥이 빠져 손을 놓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조차 하기 싫다. 혹 내잘못은 없었는지?

 

 

[교회 출석]

나이를 먹어가니 마음을 의지할 종교를 가저야겠다는 생각에 집 가까운 신성 경로교실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교회에도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회시축관계로 해운대 제일교회로 옮겼다. 둘이서 마음을 의지할 곳이 생겼다. 교회버스가 운행 해서 교통문제는 해결된 셈이지. 등록하고 기초교육 마치고 등록교인이 되었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계속디었다.

 

 

[세례받음]

나는교회에서 아네는 명성요양병원에서 (목사님과 여전도사님께서 오셔서)세례를 받았다.

 

 

[아네와 나의 병력]

우선 정신과 의원의 진단 내용은 - 차윤명 (남(79)-

*병명: 혼합형 우울및 불안장애

향후치료의견:불면,불안 우울등의 병세로 현재까지 진료함.

초진일 2003.10.30

위와 같은 병명으로 정신 신경과 의원에서 투약치료 중이며

보행 및 행동 대소변은 이상 없습니다.

 

아내 (여 76)

*병명: 혼합형 불안 우울장애 치매

향후치료의견: 치매는 초기 단계이며 불안, 초조,불면이 매우 심한 상태로 현제 까지 본원에서 진료중.

 

잠이 오지 않아 고생 하다가 병원치료를 시작 한 것이 2003,3,30 해운대 신경정신과에서 시작 되었다. 나도 불면증으로 같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는 잠을 잘 자는가를 나에게 묻길레 나도 약을 먹고 자니까 알 수 없다고 했드니 그러면 병원에 입원 해서 한번check하자고 고신의료원에 추천을 해줘서 가서 상담하고 나서 입원실에 가봤드니 Oh my got! 이건 마치 정신병자 수용소! 혼비백산 하여 도망 치듯이 나와 버렸다.

 

집에서 전에 다니던 의원에서 나 하고 함께 계속 투약 치료를 받았다.

그 당시 자기의 소원대로 대우마리나로 이사하고 정말 신혼생활이나 다름 없는 Sweet Home, 신혼생활 같은 생활이 시작 되었다. 막내까지 결혼을 하고 서울에 갔으니. 둘이서 맛있는 것 골라서 외식을 하기도 했다. 기장시장에도 가고했는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안질(눈병)로 인해 대학병원 에서 진단결과, 듣기고 처음인 ‘황반성 변형’이라고. 이병은 완치는 안되고 레이저 시술을 하면 현상유지는 할 수 있다고.

날짜를 잡아 레이저 치료를 했다. 왠 환자가 그렇게 많은지 마치 시장바닥 같았다. 시술후 눈 상태는 말 한 대로 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그후 이가 아프기 시작해서 치료를 했으나 좋은 소식은 없고 몇군데를 옮겼으나 마찬가지. 치과의사는 이상이 없다는데 자기는 No no no.

속된 말로 ‘사람 미쳐 죽을 판’ 대학병원 까지 그것도 모자라 김해까지.

나중에는 혼자서 ‘최 치과’라고 (해운대 시장 입구에 있슴)하는 곳에서 틀니를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한동안 사용 했으나, 몇 년후 (요양병원 입원중)차과에 갔더니 그 틀니는 임시틀니이고 몇 달후 다시 와서 진짜 틀니를 했었어야 하는데. 나도 그것을 몰랐었다.(내가 듣고 잊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두 늙은이가 저지런 합작 실수가 이니였나???

그후 마리나에서 신시가지의 아담하고 좋은 아파트로 옮겼다. 젊은 사람들의 천국이라 할까. 우리들 살기에도 아주 편리했다.

그후 부터 아네는 혼자서 바깥출입(산책)을 자주했다. 집앞에 있는 해운대 실내 체육과의 일층 로비 또는 장상공원등. 한날은 체육관, 한날은 장산공원

등 찾아 다니 기도 했다. (앉아 있는 꼴이 정신 나간 사람 처럼 보이기도 했다)어느날은 가랑비가 오는 날인데 체육관 휴게실에 잠퍼와 우산을 두고는 사람은 보이 지 않아 잦아 다니기도 했고, 또 두 번이나 밤 늦게 까지 오지 않아 하루는 장산공원에서 발견하고 집으로 가는 길을 뒤딸아 가보니 교통

신호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2~3개 건너서 제래시장에 가는길에서 쫓아가 만나서 데리고 집으로 오기도 했다.

한날은 9시경 까지 오지 얺아 경찰에 신고하고 순찰차를 타고 돌아봤으나 헛 수고. 집에 와보니 날 찾으러 간다고 나오던군.

하루는 제송동에 있는 모 정신과병원에 갔는데 병원 문앞에서 도망쳐 버려 찾을려고 경찰에 신고하고 순찰차로 찾아봤으나 헛탕. 가가 차서 정신이 멍 하더라. 집에서 거리가 얼마나 먼길인가? 하는 수 없이 집에 와보니 집에 와 있지않니. 걸어서 왔다고. ‘아이고 내 팔자야!’ 라고 말 할 일보전.

 

 

[119의 도움]

두번인가 밤중에 급히 119의 도움으로 제해병원에 한번 좋은 강안병원에 한번 급하게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척추관 협착증 수술]

어느날 갑자기 허리가 아파 바로 서지를 못하게 되어 ‘우리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그후로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2008,3,24~4,2-

아네는 혼자 생활을 못하니까 둘쩨네의 집에서 기거했다.

 

 

[나와 아네의 병원생화 시작]

그후에 자명병원, 효부병원, 광혜병원(두번), 해운대 요양병원을 거쳐 명성요양병원에 오게 되었는데 (나는 못 견져서 두 번 퇴원 하고 세번째 입원, 아내는 한번 퇴원하고 두 번쩨 입원) 그때마다 수송 면회, 입퇴원 수속등, 이동은 차량으로 했는데 그 수고는 이만 저만 아니였으나 싫은 내 색 한번 없이 묵묵히 해 준 둘쩨 내외 에게 이 자리를 통해서 감사 하다는 말을 전한다.

한 병원에만 계속 있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내 잘못이 많다고 생각 하기도 한다.

명성요양병원에 있을때 틀니 때문에 칫과에 갔는데 의사의 말 지금 건강상태 에서는 손도 댈수 없다고. 2층 계단을 둘쩨가 업고 오르내렸는데 애썼다. (둘쩨가 업고)

아네가 8층에 계실 때 간식은 2시반경에 특식으로 해야 했는데 (죽만 자시니 말라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우유에 선식(영양식)과 빵을 찢어서 섞어서 드렸다.

그야말로 장성을 다했다. 어쩌다 조금 늦으면 바로 앉아서 큰소리로 ‘차윤명’하고 큰소리로 불렀다고 한다. 어쩌다 외출하는 날은 마음이 몹시 바뻤다.

 

이것 다 지난 이야기이고, 돌아 가실때는 평소의 소원대로 남편보다 먼저 소천했고 남편과 자식 넷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큰 고통없이 짧은 시간에 소천 한것이 환자 자신과 남은 가족들에게도 많은 위로가 된다.

다음말은 하늘나라로 보내야 하는데 주소를 몰라서---. 열심히 기도할게.

 

 

[아네의 장례식]

상주 넷과 며누리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힘이 그렇게 클 줄 몰랐다. 상상 이외로 많은 문상객과 조화들. 3일쩨 안장하고 (내 자리는 아네 옆에 마련 해 두었슴) 돌아왔다. 3일장 마칠때 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에 돌아와서도 그랬고.

 

 

[천년을 빌려준다면]

나는 마음에 느낌이 오는 좋은 노래를 한번 들어면 반드시 배우고야 만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한번 듣고는 노래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배웠지. 지금은 종종 기회가 있을때마다 불러고는한다. 이노래도 그중의 하나이다.

 

 

 

[나도 모르게 눈믈이]

 

그런데 몇일뒤 우연히 interner에서 ‘인드라’라는 승려가 불런 ‘정주고 내가우네’ 라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는게 아닌가. 참았던 슬픔 이 드디어 폭발된것이었다. 그후 병원 위문잔치때 노래반주기에 맞춰 불렀는데 눈물이 나와 많은 환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있었다. 혹시 기회가 있으며 한번 들어보세요.

 

 

 

[나의 병원생활 계속]

산사람은 살아야 할것 아닌가. 나는 계속 병원에 머물러있다.

 

 

[요양병원이란?]

 

요양병원이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꼭 필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양병원을 일반사람들 생각에는 입원만 시켜놓으면 만사가 해결되는줄들 알고있는데 약3년 있어보니 그게 아닙니다. 가족들의 돌봄이 절대 필요한 곳입니다.

하루 세끼 밥은 주는데 반찬은 그저 그렇고. 아프면 약을 주고는 한다. 그리고 외부 의원이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때는 수속이 좀 복잡하긴 하지요.

그리고 입원환자들의 대다수는 가족들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내가 있는 10층의 형편을 보면 아마 80~90%는 반찬과 간식을 가족들이 일주일에 한번정도 보급을 해 줍니다.

아네가 있던 8층은 그의 매일같이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외출은 보호자가 동반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행이 병원측의 배려로 외출신고서만 작성하고 외출을 하고는 있습니다. 목욕도 한주일에 한번씩은 밖에 나가서하고 외식도 한번씩은 하고는 있습니다. 배려를 해주신 병원측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견디어 나가야 할텐데.

 

* 나의 자원봉사 활동의 일부를 소개 하겠습니다.

 

1. 한글서당소식

-자원봉사신문에서 발췌

 

‘피부색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

영어 통ㆍ번역 봉사단 회장 차윤명

 

영어 통ㆍ번역 봉사단 한글서당은 지난 1997년 11월 선생님 2명과 외국인 1명으로 문을 열었고, 그 동안 네 돌을 맞이하였다.

 

지금까지 약 500여명의 외국인이 이 곳을 찾아 한국말과 문화를 공부하였다.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30여명의 한국인 선생님들(자원봉사자)이 세계 여러 영어권 나라에서 모인 27명의 외국인들(학생)에게 1대1로 지도를 하는 좋은 배움의 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도하는 것은 한글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에 관한 정보도 알려주고, 또한 한국의 속담과 격언 그리고 노래도 배우며, 정기적으로 함께 여러 곳을 직접 답사하며 서로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등의 좋은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외국인들과 함께 송편을 만들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30여명의 한글서당 선생님들이 정성스럽게 재료를 준비하여 학생들과 함께 송편을 만들었다.

 

쌀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하는 과정에서 시작하는 송편 만들기에 외국인들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심히 바라보다가, 직접 송편을 만들어 보았다.

 

“예쁜 송편을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라고 했더니 매우 열심히 만들었다. 드디어 우리가 만든 송편이 익었고, 접시 위에 차려진 직접 만든 송편을 먹으며 웃는 외국인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지난번 설날을 앞두고 세배하는 법을 가르쳤더니 장난하기를 좋아하는 Scott(미국인)이 “세배하면 세뱃돈으 줍니까?” 라고 해서 한바탕 웃고 나서 윷놀이와 제기차기를 하면서 즐겼다.

 

두 달에 한 번씩 있는 ‘문화 유적 탐방’에서 복천동 박물관을 견학했던 적이 있었다. 전시된 가야 유물과 시립 박물관에서 옮겨온 전시물들을 통하여 한국역사의 일부를 보여 주었다.

 

그러던 중, 역사에 관심이 깊은 William(미국인)이 한 유물 앞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지리 선생님을 하셨던 한글서당 선생님이 다가가자 질문을 하였고, 선생님이 가야 유물들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을 때,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원봉사자들과 외국인들은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만은 아니다. 우리는 한글서당 밖에서는 친구고 이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외국인들이 낯선 이국 땅에서의 생활을 안내하는 역할도 도맡고 있다.

 

한국에 온지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Dennis(캐나다인)가 컴퓨터를 사려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말을 전혀 못 하는 Dennis 부부와 함께 컴퓨터 매장을 다니며 컴퓨터를 고르고, 가격을 비교하고, 구입하기까지 책임지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글서당 최초의 학생이며 4년간 열심히 공부한 Jamie(미국인)는 외모를 제외하고는 어느덧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송별회를 통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아쉬워했었다.

 

미국에 있는 Jamie는 가끔 한글로 이-메일(e-mail)을 보내온다. 한글서당에 이어서 미국에서도 한국어와 문화를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대학의 한국어학과에 등록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한국어 공부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한글서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 할 것이며, 계속해서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홍보에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그리하여 부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각 구의 자원봉사센터에도 한글서당이 설치되어,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외국인에게 한글 및 한국문화, 풍속 교육

- 자원봉사 회보 30호에서 발췌 (2003. 5)

- 부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 영어통ㆍ번역봉사단 고문 차윤명

 

♠「한글서당」 발대

 

1997년 11월 23일, 외국인에게 한글을 지도하고 각종 영어 통ㆍ번역 지원을 목적으로 부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 소속 ‘영어 통ㆍ번역 봉사단’이 발대되었다.

 

그 때, 봉사자(한국인 교사) 몇 사람과 외국인 학생 한 사람으로 주 활동분야인 ‘한글서당’도 함께 문을 열어, 외국인에게 한글지도 및 한국의 문화와 풍습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5년 반의 세월이 흐른 지금, 봉사자 30여명과 세계 곳곳에서 온 외국인 학생이 30여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되었다.

 

♠ 활동상황

1) 한글서당 교육내용

 

'한글서당'은 매주 토요일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일대일로 지도하는 세계에서 둘도 없는 훌륭한 배움터이다.

 

한글뿐만이 아니고 우리의 역사와 전통, 문화, 노래 등을 가르치며 정기적으로 고적과 문화유적을 답사하여 현장교육을 하는 한편 서로간의 친목도 도모하고 있다.

 

2) 대외봉사활동

 

평소 각종행사나 활동에 꾸준히 통ㆍ번역봉사를 해 왔으나, 작년(2002년)에 있었던 여러 국제행사 때에는 정말 잊지 못할 눈부신 활약을 했다.

 

특히 제1회 AVA아시아 태평양지역대회 때는 한글서당의 미남, 미녀 회원들과 외국인 학생의 3박 4일간의 사회진행, 회원들의 통역봉사, 월드컵 및 아시안게임의 향토사랑 캠페인(PSB TV 7˜9월 방영) 출연, 아시안게임, 아태장애인 경기대회, 합창올림픽 통ㆍ번역 봉사…, 회원들의 노고가 정말 대단했었다. 그 후 감사의 전자우편(e-mail)을 당시 도움을 받았던 외국인들로부터 많이 받고 있다.

 

3) 문화 풍습교육

 

구정을 앞두고 설날체험으로 한복과 설음식, 세배하는 법 등을 가르쳤고,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쟌(대학교수)은 “세배하면 세뱃돈 줍니까?” 라고 해 웃음바다가 되었다. 또 정월 대보름에 대한 이야기를 듣더니 스캇(한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만 둘을 두고 있는 대학교수)이 “올해는 예쁜 딸을 낳도록 빌어야겠다.” 며 소원을 토로했다.

동백섬의 최치원 동상 및 기념비와 해운대 석각 견학 길에 해운대 해변에서의 널뛰기, 투호 던지기, 윷놀이 등은 매우 반응이 좋았다.

 

초파일 전날 삼광사를 탐방, 불교 공부와 절의 점심식사를 대접받은 후, 형형색색 달려있는 연등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외국인 학생들의 하는 말은 “정말 아름답다.” 였다. 내려오는 길목의 동동주(탁주) 집에 가자는 간청을 들어주었더니 어디서 듣고 배웠는지 “동동주 맛 죽여주네!” 라 하여 모두 웃었다.

 

추석을 앞둔 토요일, 송편 만들기를 했다. 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하는 것부터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다, “예쁜 송편을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난다” 고 했더니 모두 열심히 만들었다. 직접 만든 송편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4) 고적 및 명소탐방

 

충렬사를 참배하고 임진왜란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일본인 학생인 미와가 자기네 조상들의 만행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마침 그날 전통 혼례식이 있어서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옛 풍습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돌아오는 길에 전통음식인 동래 파전을 맛보기도 했다.

 

세계 유일의 유엔 기념묘지 참배 때, 외국인 학생들의 묵념 태도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우리와 같았다.

 

그 외 김해박물관, 동래 복천동 박물관, 민주공원, 통도사, 범어사 등등 많은 곳을 탐방하였다. 앞으로도 더 많은 곳을 견학할 것이며, 언젠가는 한글서당 출신인 제이미와 메리앤이 초대하는 미국으로 수학여행을 갈 예정이다.

 

5) 민간외교 역할

한글서당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간 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자주 메일을 보내오는데, 제일 반가운 것은 한글로 쓴 것이다. 약 5년간 공부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제이미(Jamie)는 한국이름이 이재민인데 몇 일전에 보낸 편지에 “안녕하십니까 차선생님, 저는 이재민입니다. … (중략) … 안녕히 계십시오. 이재민 올림” 이라 썼다.

 

미국에 있는 킴버리, 호주에 있는 에이미, 캐나다의 토니, 일본의 나까자와, 중국, 대만,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전해오는 메일을 받을 때마다 “우리 한글서당이 이제는 전 세계에 알려졌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되고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외국인들이 찾아와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 한글서당의 지향점

 

우리들은 피부색은 다르나 선생님과 학생만의 관계가 아니고 다정한 친구이자 이웃이며 낯선 땅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한국의 정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또한 한글서당을 통한 민간외교의 교량역할에도 힘을 다할 것이다. 특히 부산시내 곳곳에 「한글서당」과 같은 배움터가 생겨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언어와 문화와 풍속을 알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사람의 삶

 

- 한글 전수 바쁜 ‘국제서당’ 훈장

- 외국인 ‘한글지도’ 자원봉사자 차윤명씨

☆ (2003. 6. 30 국제신문 27면 기사)

 

부산에서 8년째 영어 통역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차윤명씨. 올해 나이 일흔다섯. 현역 외국어 통역 자원봉사자 중 최고령.

지난해 그는 한일 월드컵과 부산아시안게임 등 국제행사 기간에 맹활약을 펼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요즘도 일감이 들어오면 김해공항 국제선 안내소에 무시로 달려간다.

 

 

 

(영어통역 자원봉사자인 차윤명씨가 지난 6월28일 부산 동구 초량3동 부산시자원봉사센터 ‘한글서당’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에게는 무료 통역봉사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하고 값진 일이 있다. 한글과 한국 문화, 부산사람의 따뜻한 정을 외국인들에게 가르치고 알리는 민간외교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 이, 삼, 사…, 하나, 둘, 셋, 넷…, 백, 천, 만…, 오륙도…”

 

주말인 지난 28일 오전 부산 동구 초량3동 부산시 자원봉사센터 내 ‘한글서당’. 30여 평 강의실에는 파란 눈의 남녀 20여명이 ‘훈장’의 발음을 따라하며 한글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훈장은 바로 차윤명씨.

 

한창 수업열기가 달아오를 무렵 그는 칠판에 ‘15’를 썼다. 이어 그가 “십오, 열다섯. 내 나이다. 인생은 육십부터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가장 젊은 선생님이다” 며 농담을 하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 학생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영어강사 또는 유학생, 상사 주재원 등.

 

차씨는 이 한글서당의 창설 멤버이자 대표다. 처음 문을 연 1997년 11월부터 줄곧 일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두 시간씩 강의가 열리는 서당에는 한국인 선생 20여명이 있다. 차씨의 30여분 강의가 끝나면 학생과 교사간 1대1 수업이 진행된다.

 

“전원이 자원봉사자이며 수업료도 없습니다. 비용은 각자가 내는 월 3천원의 회비로 충당하지요.” 지금까지 이 배움터를 거쳐간 외국인은 20여개국 500여명에 이른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을 묻자 차씨는 “미국인 제이미, 한글서당 최초의 학생이다. 나와 부자지간처럼 지냈거든, 4년여 있다가 지난해 귀국했는데 꼬박꼬박 한글로 편지를 보내오지. 최근엔 미국 대학의 한국어과에 등록했다” 고 소개한다.

 

제이미 뿐 아니다. 부산생활을 잊지 못해 e메일과 편지를 종종 띄우는 미국인 여성 마리안과 킴벌리,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 일본에 돌아가서도 대한항공 오사카 지점에 근무하며 부산에 오면 꼭 연락하는 나카사와, 친딸같이 대해 준 데 감사하며 편지 때마다 ‘Korean father(한국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덴마크의 여대생 루이 - -.

 

이들 모두 한글서당과 통역 봉사를 통해 알게 된 제자이거나 친구들이다. “이만하면 인터내셔널 파더(international father) 아닌가” 라며 그는 환하게 웃는다.

 

부산 토박이로 부산고,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한 차씨의 전직은 교장. 40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1995년 정년퇴임한 그는 “한평생 국가의 녹을 받았으니 이젠 사회에 환원하자는 뜻에서 자원봉사를 결심했다” 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 미8군 통역사로 근무했고, 일어에도 능통한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영어공부 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쉬는 날에도 그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외국인 친구들에게 e메일 답장을 보내고 한글서당의 강의 재료를 손수 준비한다.

 

아들만 넷을 둔 그는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건강비결을 묻자 “별다른 게 있나. 일하는 게 가장 좋은 보약이지. 힘닿는 데까지 자원봉사를 계속 할거야” 라며 사람좋게 웃었다.

 

 

 

 

 

 

나의 TV 출연 및 신문기사

 

※ 1988. 8 - 1988. 9 : 한달동안 오성식선생의 사회로 진행되었던 KBS FM1 ‘Good morning pops’(06;00~07:00) 영어 회화 방송의 ‘이럴땐 영어로?’ 란 코너에 부부가 함께 출연.

 

※ 2002. 7 - 2002. 9 : 매일 수차례씩 PSB TV의 향토사랑 캠페인(아시안 게임) 방송에 출연.

 

※ 2002. 10. 14 : KBS 1 TV 아시안게임 1주년 기념 방송에 출연

 

※ 2003. 6. 30 : 국제신문 27면 기사

- 한글 전수 바쁜 ‘국제서당’ 훈장

- 외국인 ‘한글지도’ 자원봉사자 차윤명씨

 

※ 2003. 12. 4 : KBS 1 TV ‘생생 투데이’(오후 5:45~ 6:00)에서 자원봉사 활동사항이 방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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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KBS ,MBC, PSB, 교통방송, 평화의 소리방송등 라디오 방송에 자원봉사 관계로 여러차례 인터뷰를 했음.